[Essay] 그릇 넓히기

글 입력 2024.03.0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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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 특히 이 사회의 구조와 한국적 풍토 속에서는 너무나 신경이 긴장되는 작업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전생全生의 의의가 무로 회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우리 삶에의 죄인 것이다. (s.181)

 

 

한동안 건강을 잘 관리했다는 착각과 그에서 비롯된 과신에 제대로 혼쭐이 났다. 무릎이 나가버린 것이다. 걸을 때마다 허벅지 근육이 무릎뼈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은 정말 별로다. 발을 마저 앞으로 내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놓는다고 통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한 10분 걸어본 뒤에, 이번 달은 정말 쉬어야겠다고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30분 거리도 40분이 넘게 걸리는데 무엇을 더 하겠는가. 휴식이 답인 시기가 와버린 게지.


고장난 다리로는 바깥을 마음껏 쏘다니기 쉽지 않기 때문에, 책을 빌리고 분갈이할 화분과 흙을 샀다. 이왕 쉬는 것, 조용한 취미라도 마음껏 즐겨보자는 심산이었다. 움직이기보단 가만한 관찰이 더 나은 때다.


그런 날도 맞았다. 꼭 지금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은 날들. 재미와 생활의 여부를 떠나, 어딘가에 지금 당장 읽지 않으면 영영 읽지 못할 문장이 있는 것만 같았다. 떠오르는 이름들이 몇 개 있었다.


아주 운 좋게, 원하던 책들을 빌릴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읽고 싶던 책을 빌릴 수 있던 것은 실로 ‘요행’이었다. 절판된 지 오래 되어 중고 서점에서도 찾을 수 없고, 전자책도 없어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책이었으니까. 온라인 도서관에서 실물 책을 대여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책이 발송되었다는 문자를 받은 날 마음이 심히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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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숟갈로 3번 꿀을 타고,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들곤 소파에 앉는다. 맞은편에는 창이 나 있어서, 책을 읽으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 창가에 놓아둔 화분이 절로 눈에 들어온다. 시든 가지는 더욱 잘 보이는 자리다. 잎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즉각 해치우는 것이 좋다. 어차피 읽는 내내 계속 신경 쓰이니까. 겨울을 지나며 잎이 많이 줄었다.


타인과 함께 있어야 하는 낮을 지내고 맞이하는 맥이 풀린 저녁. 적당히 늘어진 몸과,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


내가 그렇게 학수고대한 글은 전혜린田惠麟의 문장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독일에서 공부한 여성. 헤르만 헤세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 동생을 너무도 아끼던 언니.


  
나는 힘없이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실 것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Was zum Trinken?)”라는 물음의 뜻도 파악 못하고 그냥 웃어 보였더니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서 갖다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잠잠히 앉아 있었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s.20)
 


독서를 퍽 즐기는 이라면 문체가 너무나도 취향에 맞고 모든 문장에 공감 가는 책을 한 번쯤은 만날 것이라 감히 장담한다(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혹시 이 사람은 나의 도플갱어가 아닐까, 아니면 나를 사찰한 게 아닐까, 만나면 대화가 정말 잘 통할 것 같은데, 싶을 정도로 나의 속마음을 꼭 같이 쓰는 작가를 찾기도 하고.


많은 동시대의 ‘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젊은 작가들만 해도 세 줄 넘게 나열할 수 있을 테다. 문학상 앞에 이름 석 자가 붙는 옛 작가들도 이야기하라면 길게 읊을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전혜린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난 느낌이랄까. 흔히들 말하는 ‘롤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모든 문장이 적확하다.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s.140)


그리고 파고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것은 나의 생활은 아닌 것이다. 누구나의 생활에 불과한 것이지 자기를 사물이나 타자의 속에 소외해 버린 일반적인 아무나의 삶이지 그것은 일회적인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s.184)

 

 

명석함이 돋보이는 문장들이 종이를 빼곡히 채운다. 화려한 묘사가 담긴 게 아님에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유학을 떠나는 대학생으로서의 심정부터 자신의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마음까지, 이성과 열망이 가득하다. 내가 모르던 나의 마음과 생각을 타인이 정리해주는 기분. 나는 왜 이렇게 쓰지 못할까.


   
우리의 고독은 그러니까 ‘영혼의 전달’이 불가능한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지속이 불가능한 데 기인하는 불안과 회의에서 싹 트는 것이다. (s.220)
 

 

사랑하면서도 우울하고, 행복하면서도 염려가 많다. 그런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창피해지는 것이다. 내 사고방식을 뜯어보고, 최근에 뱉은 말을 후회하고, 추상적인 것을 다짐해 보기도 하고,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 못내 부러워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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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즐기는 취미가 없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현실에 안주하려던 태도가 순식간에 언짢아졌다. 물질이 전부인 삶을 목표한 적은 없음을 되새긴다. 어떠한 삶의 형태든 괜찮지만 '아무나'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데... 나름 퍽 충실히 살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살았었지. 삶을 위해 노력하던 그녀 자신의 다짐이 자꾸만 속을 콕콕 찔렀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되나요.


소파에 앉아있으니, 밖을 향해 고개를 돌린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에 뜬 것은 달 뿐인데. 필요량에 비해 적은 햇빛과 많은 달빛을 받는 듯하다. 저 아이들은 지름이 10cm인 화분만한 땅을 이 세계에서 꼬옥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작은 생명들은 좁고 동그란 땅에서도 살아가는 데에 열심이다. 그러니, 나라고 못살 것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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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야 하는 시기를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에너지가 넘치는 날엔 뛰러 나가기도 하는 날이 많았는데, 이젠 그런 충동도 참아야 하니 책을 읽는 것이 매우 적당하고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대여 기간 150일, 대여권 수 총 6권.


읽는 날이 태반이었고, 쓰는 날은 그중의 1할 정도. 허리가 아프면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잎을 살폈다. 뿌리가 나온 아이들은 화분을 갈아주었다. 원래 분을 갈면 일주일 정도는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알면서도 잎이 누렇게 뜨는 것이 만만찮게 신경 쓰였다. 햇빛을 고루 받을 수 있게 날마다 방향을 바꾸어주었다.


신경을 곧추세우는 일은 참 쉽지 않은 것만 같다. 가끔은 생각을 그만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러면 흘러가는 대로 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원하지 않는 곳에 도달해 버리는 법이라... 반추와 주의는 언제 버릇이 될까.


 

지상 목표를 인식(선과 미)에 두고 내일의 생활을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고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 과정 과정에 충실한 넘친 생을 누려줘. 자아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끊지 말고 자기를 미칠 듯이 사랑하고 아끼되, 자기의 추나 악을 바라보는 지성의 눈동자도 눈감지 말아줘. <西獨 뮌헨에서 · 1956년 1월 27일 · 너의 언니> (s.335)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시기에 읽은 책이었다. 물론 독서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완벽한 휴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그녀의 두 번째 책을 소화하고 있다. 여전히 착잡함과 동시에 뿌듯하다. 페이지마다 깨닫는 것 천지라 탄식이 절로 나오지만, 이제라도 읽어서 다행이다, 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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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간직하기엔 아까운 글과 생각들이라, 이렇게 쓴다.

 

분갈이한 아이들의 빛깔이 차츰 돌아오는 것 같다. 초록색이 짙어지고 있다.

 


* 동일 도서 인용,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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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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