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고함과 부서짐의 상관관계 - 아무튼, 연필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1.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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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에세이 ‘아무튼, 00’ 시리즈를 하나씩 읽고 있다. 여러 키워드 중 눈에 띄었던 것은 ‘연필’이었다. 그렇게 김지승의 <아무튼, 연필>을 읽었다.


지금은 디지털이 선호되고, 아날로그를 선호해 종이를 사용한다고 해도 샤프와 볼펜이 주를 이루는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에서 ‘연필’은 어느 집에나 한 자루씩 있지만, 잘 쥐어지지 않는 필기구이다. 당장 내 책상에만 해도 한 자루는 꽂혀있겠지만 그 행방과 감촉을 잊은 지는 오래다.


이처럼 잊혀가는 검은 광택의 ‘연필’이 사람과 닮아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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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 나는 다이아몬드와 흑연의 구성 성분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처럼 ‘계속 강해 보였던 나’와 ‘그렇게 강하지 않은 나’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어, 하고 놀랐다.”

 

공고해 보이는 사람은 사실 무너지기 쉬운 사람이다.


고경도의 사람은 자신을 잘 내비치지 않고, 그래서 퍼석한 마음을 나무통 안에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강인했던 아버지의 무너짐을 본 어느 날과 하루를 무사히 보냈던 내가 그날 밤 아무 예고 없이 무너져 내렸던 날들처럼. 다이아몬드와 흑연의 성분이 같은 것은 어쩌면 이 세계의 필연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공고함에 취해 자신이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할 때가 있다. 그렇기에 이유 모를 울음은 자신이 외면하고 있던 응어리들이다. <아무튼, 연필>의 저자가 된 양 얘기해 보자면 그건 보이지 않던 균열로 어느 순간 툭, 부러진 연필심이기도 하다.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 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부서짐을 약점으로 보는 내게 이 책은 ‘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모두에게 단단한 사람으로 남고 싶고, 부서져 남은 파편들을 내보이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그럼에도 공고한 ‘나’도 부서지는 ‘나’도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과 그러한 부서짐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겨서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같이 내가 간과한 사실들에 위로를 받는 것은 아마 저자도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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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연필 장례식이 있다고 한다. 연필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 남긴 골분에서 탄소를 추출해 흑연을 만들고 연필 생산 공정을 거쳐 연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만든 연필은 한 사람당 약 240자루 정도.


연필장(葬)이라니. 연필장이 가능한 것처럼 다이아몬드장도 있다고 하는데. 고인의 탄소로 만든 흑연에 높은 열과 압력을 가해 다이아몬드로 만드는 장례 방식인 것 같다. 이때의 다이아몬드는 인간 몸의 붕소 성분으로 인해 푸른빛을 띤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자본적인 거 말고. 일평생을 재화로 재고 따지던 삶과 다를 바 없는 거 말고. 나는 아름답기보다 의미 있기를 원한다.


나의 유골이 한 번에 흩어지거나 지루하게 유골함에 고여있는 것보단 흑연이 되어 천천히 부서지는 게 낫지 않을까. 가족과 친구와 사랑하는 이가 그 연필을 어느 일기장에든 메모에든 다이어리에든 사용했으면 좋겠다. 그들이 발화하지 못한 단어와 문장이 일평생 (공고함과 부서짐을 경험한) ‘나’였던 것의 부서짐을 통해 종이에 기록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다.


*


더 다양한 연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무튼, 연필>을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이 글에서 소개하지 못한 연필의 과거와 종류, 그리고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정보가 쏟아질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울 것이다. 이야기의 우연성이 제법 공고히 쌓이는 듯하면서 알 수 없는 흐름으로 흘러가긴 하지만 그것이 이 에세이의, 이 사람의 매력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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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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