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짧지만 강렬한, 신시아 오직 '숄' [도서]

기억과 생존
글 입력 2024.01.05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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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아 오직의 대표작 [숄]은 '나치'나 '수용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과거 홀로코스트의 참혹했던 역사를 강렬하게 담아내고 있다. 2천 단어 남짓한 짧은 분량이지만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다가오는 무게감은 전혀 가볍지 않다.

 

[숄]에는 로사, 로사의 딸 마그다, 로사의 조카 스텔라, 총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로사의 '숄'은 강추위 속에서 품 속의 아기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었다. 굶주려 젖이 나오지 않는 로사 대신 마그다에게 양분이 되기도 했다. 마그다는 숄 모서리를 꼭 붙잡고 빨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뎠다.

 

뼛속까지 추웠던 수용소에서 스텔라는 어느날 견디다 못해 마그다의 숄을 빼앗는다. 이어지는 마그다의 울음 소리, 다가오던 군화 한 켤레, 어깨 위에서 반짝이던 헬멧, 그리고 창공으로 날아가 전기 울타리에 부딪혀 떨어진 마그다의 몸.

 

로사는 자신의 울부짖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그다의 침이 배어든 숄을 꾸역꾸역 입에 쑤셔 넣는다.

 

*

 

수용소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로사]의 배경은 미국 마이애미이다. 살아남은 로사와 스텔라는 미국에 정착했다. 마이애미의 강렬한 햇볕은 자리를 잡은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로사에게 적응되지 않는다. 살인적인 더위는 오히려 지옥처럼 추웠던 수용소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로사의 시간은 마그다를 눈앞에서 잃었던 그날에 멈춰있다.

 

마치 미친 여자처럼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스스로 때려 부순 로사는 어느 호텔에 머무르며 종종 조카 스텔라와 딸 마그다에게 편지를 쓴다. 스텔라에게는 어설픈 영어로 편지를 쓰는 반면, 마그다를 향한 편지는 가장 훌륭한 문어체의 폴란드어로 작성된다.

 

마이애미의 밤거리도 로사에게는 적응되지 않는다. 해변가의 철조망은 수용소를 떠올리게 하고 무례한 행인들은 공포스러웠던 나치의 군인들을 생각나게 한다. 도시 곳곳이 자꾸만 로사를 마그다를 잃은 그날로 돌아가게 만든다.

 

[생존자와 생존자 그리고 생존자. 언제나, 언제까지나 생존자. 누가 그런 단어를 지어냈을까, 고통의 목구멍에 붙은 기생충 같은 단어를!] (p.59)

 

작가 신시아 오직은 미국에서 태어나 홀로코스트 당시 상황을 직접 겪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은 "홀로코스트 작가"라고 불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역사의 한순간이 생생하게, 쉽게 말을 얹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게 담겨있다.

 

로사의 시간은 마그다의 죽음을 목격한 '그'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그' 이전은 꿈이에요. '그' 이후는 농담이고. 오직 진행 중인 것만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걸 삶이라 부르는 건 거짓말이에요." 삶의 일부분을 도둑맞은 채 아직도 '그' 시간대에 머무르고 있는 수많은 개인들.

 

책의 맨 마지막 장을 넘기며 어떻게 그들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게 된다.

 

 

[정선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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