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시금치를 데치고 버섯을 볶고

글 입력 2024.04.0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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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내게 ‘출퇴근 시간’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꽤 큰’ 영향을 미치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왜냐. 나는 체력이 썩 좋지 못해서, 편도로 1시간 넘게 걸리는 전투적인 퇴근을 마치면 진이 빠져 침대에 나자빠지는 인간이니까.

꾸준하지는 못해도 뛰는 것을 좋아하고, 걷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고, 박자에 맞춰 몸을 무작정 흔들어대는 등 그냥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퇴근길을 버티기란 너무 힘들다. 우선 ‘퇴근’이라니 너무 신나고 좋은데, 몸은 전혀 신나지 않는다. 되려 시래기처럼 축축 늘어지기만 할 뿐. 그래서 편도 30분 정도 떨어진 동네로 이사왔을 때, 삶의 질이 순식간에 급상승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출퇴근 시간이 짧아지자 내 시간이 늘었고, 내 시간이 늘자 스스로에게 더 신경 쓸 수 있게 되었다. 정석적인 말 같지만 정말이었다. 체력적으로도 덜 힘든데 홀로 즐길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나니 푹 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취미 생활도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저절로 집안일에도 더 신경 썼고, 내 저녁 식사에는 더더욱 신경 썼다. 밥솥을 두고도 즉석밥을 조리해 먹던 과거의 나는 예전에 살던 동네에 두고 온 것처럼.

초반에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장을 봤는데, 먹고 난 뒤 남은 재료가 항상 골칫덩어리였다. 소분되어 있는 양을 사도 항상 남았다. 사실 1인분에는 양파 3개가 한 번에 다 들어가지도 않고, 대파 한 묶음이 다 들어가지도 않고, 부추 한 단이 다 들어가지도 않는다. 냉장고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애들은 생각보다 적고, 사람 한 명이 먹는 음식에 들어가는 채소의 양도 생각보다 적다. 다 잔머리를 굴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도 많지만, 냉동실도 생각보다 작고 반찬통도 생각보다 밀폐가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관을 잘한다 쳐도, 남은 재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막막하다. 만들어본 적 있는 음식의 재료 조합이 아니면 만들 수 있는 음식이 떠오르지 않아서 뭘 만들어 먹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완성된 단계의 음식을 위해 재료를 사기만 해봤지, 남은 재료들과 원래 냉장고 안에 있던 것들을 조합해 요리해 본 적은 없는 탓이었다. 양배추 반쪽, 깻잎 몇 장, 시금치 한 단, 달래 조금, 그리고 냉장고 밖의 고구마 3개. 대체 뭘 해 먹나요.

그래서 한동안은 또 장을 보지 않고 대충 저녁을 때웠다. 국수와 파스타는 재료도 비교적 적게 들어가는 데에 비해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배가 고픈 저녁이면 면 요리를 해 먹었다. 하지만 평생 같은 음식만 먹고 살 수 있는 노릇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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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태까지 생의 많은 부분이 ‘급발진’으로 이루어져 온 편인데, 이번에도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하루는 퇴근하자마자 장을 보러 갔고, ‘사두면 다 해치울 수 있는 재료’ 위주로 장바구니를 채웠다. 그러다 애호박을 집었을 때였나. 별안간 눈에 들어오는 가격표. 뭔가 이상했다. 요즘 들어 오른 것은 삶의 질만이 아니었다. 아차, 장바구니 물가.

재빠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장바구니에 담은 재료들을 몽땅 검색해 보았다. 훨씬 싸기는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이게 원래 이 값이었나. 하지만 느낌이 싸하기만 할 뿐, 농산물 가격에 기민한 감각은 없는 한낱 자취생이 무엇을 알겠는가. 우선 장을 마저 보고 난 뒤 집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대파 원래 영 비싸? 요즘 마트 가면 다 비싸. 엄마가 비싸다면 비싼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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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귤 철이 다가오면, 우리집에는 항상 ‘파지’가 넘쳐났다. 흠집 혹은 크기 때문에 상품성을 잃은 귤들. 맛만 좋은데 판매 가치가 없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채소들을 냉장고에 넣다 문득 ‘파지’가 생각났다. 폰을 꺼내 검색창에 ‘못난이 채소’를 입력했다.

요즘 세상은 너무 똑똑하다. 못난이 채소만을 판매하는 서비스가 검색 결과 맨 위에 떴다. 바로 구독했고, 며칠 뒤 몇 종류의 채소가 박스에 든 채 문 앞에 놓여있었다.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내가 고른 것 절반, 무작위로 담긴 것 절반이 들어있었으니까. 태어나서 먹어본 적도 없는 나물도 있어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조차 알지 못해 코부터 킁킁댔다. 내가 설마 고수 같은 걸 고른 건 아니겠지, 하며.

팽이버섯과 흰만가닥버섯으로 버섯 콩피를 만들었다.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유는 무슨 요리에든 요긴하게 쓰이고, 페퍼론치노 같은 매운 향신료는 하나 정도 사두면 좋다. 팽이버섯은 냄새가 안 나는 편이지만, 정말 구린내가 나는 버섯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유럽 상추는 고깃집에서 볼 수 있는 상추보다 훨씬 작고 귀엽다. 그래서 쌈을 싸 먹기보다는 그냥 샐러드로 먹는 게 나은 듯도 하다. 나물류는 불이 닿으면 날 것이었을 때의 모양이 멋쩍을 정도로 부피가 줄어들며, 버섯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깻잎도 마찬가지다. 못생긴 고구마는 깎기가 정말 불편하고, 달래는 빨리 해치워야 한다. 시금치는 먹기 전에 한번 데쳐야 한다. 무엇이든 볶을 땐 수분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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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려면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을 여태껏 ‘힘내려면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 정도로 이해했었다. 한데 나름 챙겨 먹어보니, 지금까지 이해한 뉘앙스와는 조금 다르게 해석된다. 입에 들어가는 것들에 신경 쓰고, 공들여 만들어놓은 반찬과 양념으로 끼니를 해결하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생활력이 생기는 느낌이 기분 좋은 것은 1인 가구의 가장으로서 어쩔 수 없는 걸까. 흙 묻은 재료를 다듬다 보면 내가 쉴 공간을 닦고, 피부에 닿는 것들에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는 체력이 차오른다.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워 매번 잘 해내지 못했던 게 ‘나’를 돌보는 일이었다. 아무리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인센스를 피운 채 누워도 그날 저녁 먹은 인스턴트가 결국 하루를 정의 내리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내가 만든 파스타 샐러드를 먹고, 직접 쪄서 만든 버터갈릭고구마를 먹으면 하루 끝에 배도 부르고 마음도 괜히 불러서 만사 여유롭게 느껴지곤 한다. 급한 3분 마무리가 아니라, 30분 명상이라도 한 듯한 하루 끝.

시금치를 데치고 버섯을 볶는 이 모든 행위가 결국엔 ‘나’로 귀결된다는 게 실로 귀찮으면서도 거창하다. 배만 채우면 그만인데. 하지만 경수채가 들어간 샐러드를 먹은 뒤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고 빨래까지 개면, 그날은 해낸 일이 수없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해 먹고 집안일을 해냈을 뿐이라 별일 아닌 게 맞긴 하다. 하지만 내가 소소하게나마 행복하면 그만인 것 아닐까. 세상은 각자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지만, 이 정도의 행복은 혼자서도 집에서 분주하게 굴며 느낄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오늘도 무청을 잘라내고, 미니 청경채와 쑥갓을 씻었다. 사과는 아침에 먹기 편하게 씻어둬야지.

덧. 통마늘을 다질 때마다 집과 엄마가 생각나는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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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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