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패왕별희 - 안녕, 나의 애첩이여. 안녕,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나. [영화]

글 입력 2024.04.0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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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jpg
중경삼림 중_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싶다.

 

 

며칠 전은 4월 1일이었다. 4월 1일 만우절에 우리 학교는 신나서 교복을 입고 강의실에 들어온 학생들로 북적거렸고, 나는 그런 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만우절과 관련된 것들을 떠올렸다. 헤어진 여자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유통기한이 4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은 중경삼림의 금성무. 4월 1일 밤, 한 달 동안 모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이런 대사를 말한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4월 1일 하면 나는 또 장국영이 떠오르고 만다. 내가 태어난 해의 만우절 날 세상을 떠나버린 장국영. 선이 굵은 남자인 듯하면서도 우수 어린 소년인 것 같고, 세상에 초연한 듯 시니컬하면서도 열정적인 자신만의 멜로를 경험한 것 같은 사람인 장국영을. 그리고 그런 오묘한 장국영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를 다시 주섬주섬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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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의 애첩 우희

 

 

'패왕별희'_ farewell my concubine

 

패왕별희는 중국의 전통극인 경극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초나라의 패왕인 항우와 그 애첩인 우희의 사랑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의 패왕이 사방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 즉 사면초가 상황에 있을 때 유일한 편이 되어준 우희. 이후 항우는 자결했으며, 우희 역시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데이와 살로는 한평생을 경극 배우로서 패왕별희라는 작품을 공연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예술과 그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변하는 법. 온 세상이 미쳐 날뛰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 중국 역시 미쳐 날뜀의 소용돌이에 있었고, 전쟁과 이념 정쟁, 문화대혁명 등 격변의 시기 속 예술인들이 어떠한 굴곡 있는 삶을 살아야 했는지를 데이와 샬로의 다사다난한 생애를 통해 보여준다.

 

이청준의 액자식 구성형 소설의 전개와 같이, 이런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데이와 샬로의 삶은 그들이 연기했던 패왕별희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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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데이의 모습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아이도 아닌 것이 머리를 깎이어…. 아니 우리 다시 하자”


남자이지만 평생을 여자인 우희 역할을 연기한 데이는 어릴 적부터 담뱃대로 입안이 지져져 가며 혹독하게 여자의 역할을 하도록 훈련받는다. 본래 계집아이로서 사내아이도 아닌 것이, 라는 대사이지만 자꾸만 배역이 아닌 데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때 호되게 담뱃대로 입안을 지진 것이 바로 이후 패왕역을 평생 맡게 되는 샬로. 어린 시절부터 데이는 이런 샬로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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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직접 샬로의 화장을 해주는 데이. 우희의 모습과 겹쳐진다.

 

 

“평생을 같이 하기로 했잖아. 일분일초라도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건 평생이 아니야!”

 

샬로를 우희의 연인 패왕으로써, 그리고 한 남자로써 사랑하게 된 데이는 경극이 끝난 후 샬로에게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을 한다. 하지만 샬로는 경극과 자신의 삶을 잘 구분 짓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을 뿐. 데이를 아끼지만, 홍등가에서 일하는 쥬샨과 사랑을 나눈다.

 

“샬로. 이제부터 너는 너. 나는 나다.”

 

샬로가 쥬산과 사랑을 하는 것을 알게 된 후, 데이는 경극배우를 꿈꿔왔던 어릴적 두 사람이 가지고 싶어했던 보검을 샬로에게 전해주며, 자신의 사랑에 종말을 고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여러 질곡의 세월 동안 인연이 얽히고 섥히며 질기게 이어져 가고, 결국 예술인들이 지탄을 받았던 문화대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그는 경극에 미쳤습니다. 경극에 미쳐서...관객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노래를 했습니다.”

 

문화대혁명 시기 경극인들은 반동분자라는 이름 아래, 공개적으로 조롱받고 서로를 비난하게 강요받는다. 그 과정에서 샬로는 과거 부자들과 일본군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데이를 비난하고, 데이는 샬로의 아내인 쥬샨이 과거 창녀였다며 맞받아친다.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이를 확인시킨다. 이 지긋지슷한 경극인의 인생은 어떻게 끝나야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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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너머로 샬로를 바라보는 데이의 눈빛이 섬칫하다.

 

 

“힘은 산을 뽐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 한데,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가? 우희야, 우희야. 어찌할 것인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다시 만난 늙어버린 두 사람은 또 한번 패왕별희를 연기한다. 아무런 관객도 없이 텅빈 강당에서 단 둘이. 초나라가 패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우희를 연기하는 데이를 비춰준다. 선뜩하게 빛나는 데이의 눈빛. 데이는 우희처럼 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울부짖는 샬로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나는 매일 꼬박꼬박 두장씩 글을 쓰기로 한 것도 3일 만에 지키지 못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삶 조차도 때로는 나에게 버거울 때가 많다. 내가 나로써 존재하는 것이, 나만이 결국 나를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끔은 압도되어버린다. 하지만 저 미친 시대의 소용돌이에서 살아가야 했던 데이, 쥬샨, 샬로의 삶은 그런 나의 삶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너무나도 유약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견뎌내기엔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으리라.

 

다나자키 준이치로의 치인의 사랑, 이라는 책이 있다. 미치광이의 사랑. 광인의 사랑. 일분 일초를 함께 보내지 않으면 평생이 아니라는 데이의 광적인 사랑은 얼핏보면 너무나도 비운했던 천재의 삶속 천재성의 한 편린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광적인 사랑이 결국 스스로를 구해내야만 했던 처절한 생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데이의 미친 사랑은 한 인간이 겪어내야 했던 사랑의 결핍과 학대, 그리고 혼란한 삶 속에서 취해야만 했던 하나의 삶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비루한 목숨을 유지하고 우희로서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 이 미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한 미친 사랑.

 

자신을 고위 간부들에게 바치고 감옥에 갇힌 샬로를 구해냈을 때의 마음. 그러자 매국노라며 비난하는 샬로에게 부정당한 이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인 패왕을 저버릴 수 없는 우희의 마음을 빌어 점점 희미해지는 데이로서의 자신을 힘겹게 유지해나갔던 것은 아닐까.

 

“나는 비구니.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아이도 아닌 것이 머리를 깎이어... 나는 비구니.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서, 사내아이도 아닌 것이 머리를 깎이어...”

 

경극 수련생으로서의 데이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른다. 어릴 적 어미에게 육손을 잘리고 경극 수련생으로 들어와 여자 역할을 맡게 된 예쁘장한 소년. 자신을 부정당하고 계집아이로의 성을 새롭게 부여받았으며, 담뱃대로 지진 입안의 상처는 입 안 뿐만 아니라 마음에까지 낙인을 찍었다. 그에게 새로이 부여받은 우희라는 페르소나를 평생 껴안고 살아가며 타인에 의해 평가받고 때론 사랑받고 때론 멸시받고 괄시받는다. 그리고 결국 우희의 분장을 한 채, 우희와 같은 결말로 자신의 삶을 매듭지은 데이의 모습에서, 이 영화는 비운의 천재 이전에 미친 시대 속에서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유약한 인간의 모습에 우리는 눈물 짓게 되는 것 아닐까, 라고 평범한 인간인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김정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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