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저항을 노래하다. [음악]

글 입력 2023.11.21 11:4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대중음악사가 큰 강줄기라면 그 발원지에 있는 김민기 가수를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70년대 청년문화의 원형을 만든 김민기 가수는 암울했던 정치상황을 관통한 노래로 독재정권의 대척점에 선 가수였습니다.

 

 

스크린샷 2023-11-21 165402.png

 

 

그의 평생의 꼬리표는 나이 만 스물에 지은 아침이슬이었습니다. 그는 미술 전공자였고, 그림 물감 값이 없어 노래를 시작한 김민기는 서울대 회화과 대학시절, 젊은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였던 명동YMCA에서 ‘청개구리’ 노래를 부르던 대학생이었습니다.

 

그시기, 김민기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양희은을 만납니다.


둘은 넉넉치 않은 집안사정을 공통분모로 김민기는 양희은의 작곡가가 되어 양희은의 데뷔곡을 작곡해주었습니다.

 

당시 아침이슬은 김민기의 1971년 1집 앨범에 수록되었으며, 같은 해 동일한 곡을 김민기가 편곡하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많은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1. 평범한 미술학도에서, 반체제혁명가 못지않은 감시와 탄압, 시련의 연속 - 김민기는 여느때와 같은 평범한 대학생의 인생을 살던 중, 서울문리대 신입회 환영회 공연에서 부른 꽃피우는 아이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됩니다. 조사를 받던 김민기는 1971년 양희은의 고운노래모음 1집에 수록된 김민기 작곡노래들을 모두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당시는 1975년 유신 정부의 긴급 조치 9호에 의해 금지곡에 선정되었는데요. 아침 이슬의 금지곡 선정 이유는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라는 이유였습니다.


당시가사_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묘지는 당시 민주 항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뜻하고 그 위에 떠오르는 태양은 일출의 이미지, 즉 새로운 아침, 새 시대, 새 희망을 뜻한다'거나, 보다 과격하게는 '위대한 인민 지도자(태양)이 혁명파들의 시체(묘지)들을 넘고 공산주의 락원(붉게)을 세운다(떠오른다)'고 다소 억지스럽게 말을 엮을 수는 있을 수 있겠습니다.

 

또한 사형수들의 형이 집행되었을 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표현합니다. 때문에 "아침 이슬"이라는 노래 제목과 가사에서 사용되는 예가 극히 드문 "묘지"라는 단어를 쓴 점으로 볼 때, 금지곡 선정위원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불순한 의도로 곡을 만들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리고 가사가 추상적이고 비유적이지만 억압과 해방의 뉘앙스가 느껴지고 폭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유신 집권층에서는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당시 한국 운동권들의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혁명적 낭만주의가 가장 수용하기 쉬운 민중가요로써의 아침 이슬을 재탄생시켰으며, 아침 이슬이 운동권 집회에서 널리 불려지고 유신 정부의 금지곡 지정이 겹치면서, 스트라이샌드 효과가 일어납니다.

 

스트라이샌드 효과는 어떤 정보를 숨기거나 삭제하려다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반대로 그 정보의 확산을 가져오는 역효과를 말합니다.


유신정권의 금지곡 선정은 결국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신촌 로터리 부근에 운집한 100만 명의 군중들이 유일하게 다 같이 아는 노래가 애국가와 아침 이슬밖에 없었다고 할 만큼 대중적인 민중가요가 되었습니다.


2. 김민기의 15년간의 인내 - 김민기의 노래들은 1972년부터 1987년 6.29선언으로 15년간의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정치척 탄압으로 정상적인 가수의 활동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는 졸업 후 농사를 하여 농촌 청년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제대 후 공장생활을 하며 만든 거칠은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은 훗날 상록수라는 제목으로 사랑받았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새롭게 조명받기도 합니다.


3. 극단 “학전” 연출가의 삶 (현재) - 이후 김민기는 매체, 언론 출연에 있어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극단 학전을 설립 후 묵묵히 연극을 올려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던 시대의 양심이 되었고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꿈 많은 대학생에서 농사꾼으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스스로의 봉우리를 세운 그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높은 봉우리였습니다.

 

 

[배윤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