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오펜하이머 속 미국성에 대한 짧은 글 [영화]

글 입력 2023.09.0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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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에 대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고, 핵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의 인간적인 면모들, 혹은 세계 2차 대전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매체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는 모종의 미국성(Americanness), 그러니까 미국적인 느낌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했는데, 평소에 받기 힘든 인상들을 전해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이 글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의 배경에 나타나는 학문적인 분위기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하게 되었다. 어려운 양자역학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미국이나 유럽의 분위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영화를 더 풍성하게 느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당시의 정확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볼 계획인 사람들,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더 궁금해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는 내용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영화의 더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다면 영화의 원작인 오펜하이머 평전(『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어보아도 좋고, 여러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다루고 있는 해설들을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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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화의 초반부에 오펜하이머가 거친 공간들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영화에서 오펜하이머가 로스 알라모스에 가기 전까지, 그러니까 학자로서의 정체성밖에 없었던 시절에 오펜하이머가 거친 학교들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하버드 (Harvard University, 미국)

- 케임브리지 (University of Cambridge, 영국)

- 괴팅겐 (Georg-August Universität Göttingen, 독일)

- UC 버클리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미국)


오늘날에는 하버드나 UC 버클리 같은 미국의 대학교들이 명문대라는 인식이 있으나, 오펜하이머가 공부하던 당시에 과학의 중심지는 유럽이었다. 미국이 학문의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이 경제의 중심지가 되고 그로 인해 연구 자금이 미국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들 대부분은 1940년대 이후에 수상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 유수의 대학교들은 오펜하이머가 학생이던 시절에는 학문을 선도하는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영화 초반부에 미국인 오펜하이머가 겪는 고생들은 마이너리티로서의 고통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케임브리지에서 그가 실험 수업을 수강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손재주가 좋지 않아 실험 장비를 망가뜨리고 이내 동료들이 그를 비웃고 교수가 그를 꾸짖는다. 이 장면은 미국이라는 변방 지역에서 공부하러 와서 주류적인 학문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학생들과 교수의 비웃음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 전, 유럽 중심 세계의 권위를 보여주는 면도 있다. 초반의 이러한 장면들은 결국 영화의 후반에 이어지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과 미국주의적 색채를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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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미국주의적인 영화라는 느낌이 느껴지는 부분을 또 한 군데 꼽자면 오펜하이머가 당시 유럽 예술을 향유하는 장면들이 있다. 오펜하이머가 케임브리지에서 괴팅겐으로 옮기는 무렵에 오펜하이머가 즐기던 예술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거기서 그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기도 하고, 피카소의 추상화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여인’을 감상하기도 하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들으면서 유리잔을 집어던지기도 한다. 이는 세계 대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이미지들을 중첩시킴으로써 오펜하이머가 유럽에서 보낸 시간을 집약적으로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예술적인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세상을 점점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만 작용할 것 같던 인간의 사고와 논리가 결국 인류를 학살하고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회의와 반발이 낳은 것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모더니즘 작품들은 인류의 잔혹성과 비논리성을 극복해내는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머금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모더니즘적 이미지를 끌어다 쓸 때는 이러한 맥락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가 철저히 미국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미국에서 동떨어진 공간에서 진행되었고, 피를 목격한 적 없는 미국인들에게 이러한 전위적인 예술은 하나의 사조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모더니즘 예술 속에서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는 영화에 나타나지 않고, 영화의 후반부는 전쟁을 승리하기 위한 핵폭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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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을 덧붙이자면, 영화에서도 언급되듯이 오펜하이머는 UC 버클리와 칼텍(Caltech,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동시에 교수 임용이 되고, 그는 버클리를 선택했지만 칼텍에도 왕래하면서 강의를 한다. 이 영화에서 패서디나(Pasadena)라는 지명이 언급되는데, 그곳이 칼텍의 소재지에 해당한다.


패서디나라는 지명이 익숙한 사람들은 아마 미국 시트콤 《빅뱅 이론》을 애청했을 것 같은데, 《빅뱅 이론》의 배경이 패서디나이기 때문이다. 《빅뱅 이론》은 칼텍 물리과에 재학 중인 물리 괴짜들이 옆집에 이사 온 배우지망생 페니와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들을 그리고 있다. 이 괴짜 물리학도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오펜하이머와 같은 미국의 과학자들이 미국의 연구 환경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패서디나를 말할 때 《빅뱅 이론》 작중에서 이론물리학을 공부하는 쉘든이 연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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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로버트 오펜하이머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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