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래를 기억하는 일이란 [도서/문학]

발산하는 시간 속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
글 입력 2023.08.1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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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암 환자의 이야기는 다양한 작품에서 다룬 설정이다.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 또한 “온전한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한 채 살아온 화자가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후 얻은 폐가를 자신만을 위한 공간으로 고쳐 현재의 삶에 충실하려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뻔한 감동 서사의 소설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 읽고 나서는 세상 유일무이하다는 인상이 강렬하게 남았다. 정용준 에세이 『소설 만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칫 뻔하고 상투적일 수 있는 평범한 삶이 특별해지는 것은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사람 속에 숨어 있는 특별함이 적절하게 이야기될 때다.

 

『소설 만세』 중

 


문학을 포함한 예술에는 어느 정도 틀이 있다. 작가들은 매번 완전히 새로운 창작을 하는 게 아니라 클리셰라고도 불리는 그것을 조금씩 바꿔가며 새롭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비슷한 이야기라도 쓰는 사람이 다르고 같은 설정이라도 등장인물들은 고유하기 때문이다.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은 화자만의 언어와 시선, 관념을 통해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인물의 특별함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최진영이 어떻게 화자의 이야기를 그려냈는지, 최진영이 그려낸 화자는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삶과 죽음이 아닌 존재와 사라짐



화자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이후부터 시간을 '발산한다'라고 해석한다. 현재가 진행되면 과거는 사라지고,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현재, 과거, 미래가 멀리 떨어져서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에도 과거는 존재하고 미래 또한 기억할 수 있다. 


 

분명 일어났으나 아무도 모르는 일들.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무수한 순간들. 그런 것들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한 사람의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을 수만은 없고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청개구리를 기억한다. 이유를 망각한 나의 울음을 기억한다. 

 

「홈 스위트 홈」 중

 


화자의 기억 속 최초의 집에서 두어 살이던 화자는 툇마루에서 청개구리를 발견한다. 그것을 만져보기 위해 손을 뻗지만, 청개구리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화자는 운다. 그 이유를 현재의 화자는 알지 못한다. 이런 일 따위 기억해도 그만, 기억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어느 한 사람을 이루고, 누군가는 그 기억으로 인해 살아가기도 한다. 과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존재한다. 아니, 화자의 말대로라면 시간은 발산하므로 ‘언제 어디서’라는 시공간 없이 과거는 그저 존재한다. 

 

그렇다면 미래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면 미래는 존재한다. 고로 기억할 수 있다.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 언젠가 맥락 없이 떠올린 장소, 장면, 사람을 추후 마주하는 일을 한 번쯤 겪어봤을 터다. 나 역시 그러므로 시간을 진행 순서대로 이해하는 일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우리는 왜 과거, 현재, 미래를 차례대로 받아들이는 걸까.


세상은 변한다. 새 물건에 먼지가 앉고 색이 바래고 부식되면서 헌 물건이 되고, 인간은 몸이 커지고 어휘가 늘고 주름이 늘면서 노화한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시간뿐이다.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세상은 변한다. 눈에 보이는 명확한 물증으로 인해 우리는 시간을 순서대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전과 너무 달라진 나의 외형, 나의 물건, 나의 가족, 나의 사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다른 이유로는 삶과 죽음이 있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동시에 한 세기의 세월을 살아온 이의 죽음. 세상에서 누군가가 탄생하고 존재하던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시간의 흐름으로 이해되는 삶과 죽음을 ‘존재, 사라짐’과 비슷하게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삶과 죽음, 즉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삶과 죽음이 아니라 존재와 사라짐으로 이해하고 싶어 한다.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발생과 소멸을 시간이란 개념 바깥에서 이해하고 싶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 바뀌어 달라지는 것. 시간을 배제하고 변화를 말할 수 있을까. 죽음 다음이 있다면, 어쩌면, 시간에서 해방된 무엇 아닐까.

 

「홈 스위트 홈」 중


 

그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삶을 위해서이다. 그냥 삶이 아닌 살아있기 위해서이다.


 

 

미래와 기억, 그 기억으로 살아가는 삶



암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 화자는 남들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화자와 화자의 동거인 어진, 화자의 엄마는 완치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수술과 항암 치료, 2차 재발로 화자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에 처한다. 치료가 몸을 고치는 건지 천천히 죽이는 건지 헷갈릴 만큼 지친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마음이 화자 안에서 장력처럼 끌려 나온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집은 아직 없었다. (……) 나는 선택하고 싶었다. 나의 미래를. 나의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살아 있다는 감각에 충실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치료는 그런 것이었다.

 

「홈 스위트 홈」 중


 

화자가 사십 대가 될 때까지 거주했던 집은 대략 열일곱 집이지만, 그 많은 곳 중 화자의 집은 없었다. 보증금과 전세, 월세를 번갈아 가며 남의 집에서 거주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집’을 가지고 싶어 한다. 어렸을 적 청개구리를 발견했던 곳과 유사한 자기 집을 말이다.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삶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삶을 보내길 원한다.


화자에게 더 이상 시간은 상관없다. 죽음이 있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고통받는 대신 본인 안에서 시간을 파괴하고 공간을 건축한다. 화자는 종이에 본인이 기억하는 집을 그린다. 그곳에서의 삶을 기억한다.

 

 

비 오는 날 여기에 앉아 부추전을 만들어 먹었어. 텃밭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이 텃밭에서 부추를 가위로 잘라 와서.

어진이 물었다. 언제?

나는 대답했다. 미래의 어느 여름날.

(……)

좋다. 부추전 말고 또 뭐가 있어? 무언가를 먹은 기억.

콩국수. 채 썬 오이랑 당근 얹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김치볶음밥. 계란 지단을 얹어서.

잠시 그림을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이 집에서 죽어.

그 순간, 내 주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미래와 희망을 느꼈다.

그럼 나는?

어진이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나와 같이 여기서 살지.

이 집은 어디에 있어?

완치하리라는 희망보다 훨씬 단단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이제 우리가 찾아낼 거야.

 

「홈 스위트 홈」 중

 


미래를 기억한다는 건 어쩌면 희망과 염원을 실현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다만 화자에게는 확연히 다르다. 희망과 염원은 '바라는 마음’이므로 기대와 실망이 뒤따른다. 실현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미래를 기억하는 건 말 그대로 ‘기억’이다. 기억은 존재하므로 실체와 확신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반드시 화자가 말한 대로 살 것이다. 화자의 기억 속 집에서 부추전과 콩국수,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살 것이다. 누군가는 어느 기억으로 인해 살아가기도 한다. 화자 역시 그렇다.


 

이런 기억은 오직 나만 아는 것. 나만 기억하다가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

 

「홈 스위트 홈」 중


 

기억은 존재하는 동시에 사라진다.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라지면, 기억 또한 사라진다. 화자의 말을 빌리면 한 사람의 인생이란 기억의 총합이므로 기억이 사라지면 사람 또한 사라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흔적이라는 것이 있다. 폐가를 고치다 발견한 문틀에 남아있는 키를 잰 표시와 창문에 붙은 야광 별 스티커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이 집에 살았다는 흔적. 누군가의 흔적. 기억의 흔적.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이란 기억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떠났고 집은 버려졌어도 거기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홈 스위트 홈」 중


 

전 세계적으로 남아있는 종의 기억도 있지만, 대체로 기억은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아주 사소하고 낱낱의 기억일지라도 흔적은 남는다. 2000년대를 마지막으로 발길이 끊긴 온라인 모임이라든가 학교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쪽지, 그 쪽지를 쓴 듯한 잉크가 다 닳은 볼펜, 다른 이름의 명찰을 여러 번 덧대어 꿰맨 교복, 겨울 코트 주머니에서 나온 초콜릿 포장지, 혹은 중고로 산 옷 주머니에서 나온 영수증과 지폐 몇 장. 

 

흔적은 두고 간 것이다. 흔적의 주인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기억과 함께 두고 간 것이다. 화자는 시골의 어느 폐가를 사서 기억과 최대한 유사하게 집을 고치기 시작한다.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여름날 땀 흘린 뒤 시원한 찬물 샤워. 겨울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보는 밤하늘.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과 맞잡은 손. 마주 보는 눈동자. 같은 곳을 향하는 미소. 다정한 침묵. 책 속의 고독. 비 오는 날 빗소리. 눈 오는 날의 적막. 안개 짙은 날의 음악. 햇살. 노을. 바람. 산책. 앞서 걷는 당신의 뒷모습. 물이 참 달다고 말하는 당신. 실없이 웃는 당신. 나의 천국은 이곳에 있고 그 또한 내가 두고 갈 것.

 

「홈 스위트 홈」 중

 


화자는 ‘집’을 가짐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의 기억과 자신이 존재했음을 두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화자이기에, 그 기억이 누군가에겐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세상에 남을 엄마와 어진, 그리고 먼저 떠날 자신이 이 집에서 잘 살아가길 위하는 마음도 컸을 것이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죽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니까. 미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이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눈앞에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나타났으므로. 어느 여름날에는 툇마루에 청개구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청개구리는 사라지고, 나는 이유를 모른 채 울어버릴지도. 나는 다시 아플 수 있다. 어쩌면 나아질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 누구나 겪는다는 결과만으로 그 과정까지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제 나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 한 송이,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

 

「홈 스위트 홈」 중


 

삶과 죽음은 신이 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살아나고 죽었을 때 신을 애타게 부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째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이십니까. 그러나 삶과 죽음 틈, 아주 작고 미세한 것은 인간만이 감각할 수 있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지만 차이는 있는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시간이 발산한다고 생각하는 것. 어떤 차이가 있나, 차이를 두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화자가 삶을 감각하며 살게 한다. 죽음은 신이 정하므로 화자가 죽는 순간 또한 이미 정해져 있겠지만, 화자만의 미세한 마음과 기억은 분명 신은 모르는 무언가를 변화시킨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희망과 염원이 실현되길 기대한다면 저 멀리 존재하는 과거를 데리고 오거나 미래를 기억해 보는 건 어떨까.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깨부수고 사라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을 존재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 말이다.

 

 

[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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