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역사라는 난폭한 화염에 데어버린 남자 [영화]

이창동, <박하사탕> (1999)
글 입력 2023.07.2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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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


 

한국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격동의 역사를 통과해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 식민과 해방,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로의 편입에 이르는 데에는 백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압축적 역사라는 화염은 매우 난폭해서, 자의와 무관하게 그 불꽃을 마주했던 숱한 이들에게 치유불능의 화상을 입혔다.

 

<박하사탕>은 그런 화상을 입은 한 사내의 20년에 달하는 세월을 조명한다.

 

이창동은 남자의 인생을 일곱 단막으로 나누어 시간의 역순으로 배열하는 독특한 구성을 시도했다. 이러한 구성은 삶을 역추적하여 한 사람의 어떤 내력을 밝혀내기에 용이하다. 첫 번째 장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를 목 놓아 외치며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남자가 왜 그런 선택을 했으며 왜 실성하여 동창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연원을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차근차근 현시한다.

 

 

 

소시민 주체 혹은 객체


 

주인공 김영호는 공원-군인-형사-가구상이라는 직업을 거치는데, 그는 역사의 전모를 몸으로 보여주기에는 주변적이고, 관념으로나마 한국사의 질곡을 이해하기에는 지식이 부족하다.

 

또한 그는 중간자적 입장에 놓인 존재다. 김영호는 평생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그래서 영화는 가해자의 부조리와 피해자의 고통을 회고하는 윤리적 증언담과는 일찌감치 거리를 둔다.

 

<박하사탕>은 멍하니 서 있다가 역사라는 화재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 온몸에 불이 붙어버린 평범한 남자의 일생을 다룰 뿐이다. 한마디로 그는 소시민 주체다. 사실,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든다. 그의 생애는 자율적 결단보다는 체제의 강압과 세속의 관성적 질서에 의해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상처를 향한 여정


 

영화는 아주 느리고 무겁게 상처의 중핵에 접근한다. 초반부에 이창동은 김영호에 대한 감정이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가구상 하다가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동업자한테 사기당하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았으니 애처롭기는 하다.

 

하지만 자살을 결심하고 나서도 천원짜리 커피값을 떼먹을 때의 야비한 표정을 보면 그에 대한 동정은 싹 가시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아이 얼굴 보려고 전처에게 갔다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강아지 이름을 부를 때, 흉한 식물인간으로 변해버린 첫사랑에게 박하사탕을 건네줄 때는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이 시간여행은 얼마간 계속 이런 식이다. 중산층 가구상 시절과 고문을 일삼는 형사 시절의 김영호에겐 가증스러운 속물성과 잔혹한 가학성 위로 맑은 색감이 어슴푸레하게 스쳐 갈 뿐이다. 가구점 직원과 맞바람을 피고 식당에 방문한 김영호는 형사 시절 고문했던 남자와 조우한다. 어느덧 아이의 아빠가 된 옛 운동권 학생에게 그는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영호에 의해 고문당했던 남자에게도 김영호에게도 그 말은 반어로 들린다.

 

 

 

남자의 얼굴


 

신입 형사 시절, 그리고 군생활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사내가 입은 상처의 근원과 인간의 얼굴을 동시에 발굴해낸다. 경찰서에 갓 부임한 그는 과거에 가리봉동의 공장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노조원에 대한 고문을 임무로 부여받는다.

 

노동자를 끌어안고는 떨리는 눈빛으로 “제발 불어”라고 말하다가 광기 어린 구타를 시작하는 장면은 그가 악의 평범성을 체현하는 기점이기도 하지만, 남자가 아직은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선배들의 종용에 의해 고문을 개시할 때 김영호가 지은 표정은 무심한 폭력기계보다는 생동하는 사람의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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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하게 내리쬐는 첫사랑의 볕


 

분명히 그에겐 첫사랑이 있었다. 두 사람을 무심하게 갈라놓은 역사의 전횡도 그제서야 드러난다. 다소 작위적으로 삽입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80년 5월 광주를 지나서야 우리는 종착역인 첫사랑의 공간, 도입부에서 김영호가 20년 후에 자살을 시도하는 바로 그곳에 가 닿는다. 긴 여정에 지친 몸으로 이곳의 화사한 햇볕을 쬐고 나서야 김영호는 비로소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다. 처음 와본 이곳이 익숙하다는 그의 말에 애인은 꿈에서 봤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꿈은 박하사탕처럼 달콤해야 했을 테지만, 꿈의 전 과정을 지켜봐 온 관객은 그 꿈이 악몽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남자는 그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모종의 눈물을 흘리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1999년의 짓이겨진 남자는 1979년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원활한 감정이입을 가능케 한 셈이다.

 

남자의 눈물은 개인적 체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실 우리 역사의 계속된 슬픔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는 모두의 눈물로 전화한다.

 

 

[최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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