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6인용 식탁, 4개의 의자

글 입력 2024.01.2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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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이 살던 우리 집에는 내 고집으로 우겨, 거실에 욱여넣은 6인용 식탁이 있었다. 설치 기사는 좋은 가구를 잘 골랐다며, 요즘 ‘오늘의 집’에서 판매율 1위라며 너스레를 부렸고, 조립한 의자 등받이를 흔들면서 말했다.

 

“이게 사람이 안 앉아 있을 때는 이렇게 흔들리는데.”

 

그러고는 나를 재촉해 의자를 앉히고는 등받이를 흔들었다.

 

“봐봐요. 사람이 앉으면 안 흔들리죠? 이게 원목 가구라서 그래.”

 

그런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고 뒤이어 들어온 동거인에게 말하자 ‘원래 사람이 앉으면 안 흔들리는 거 아니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가, 그 말도 일리 있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안 앉으면 이렇게 흔들리는데, 사람이 앉으면 안 흔들려.

 

사람은 둘인 집, 의자는 네 개, 식탁은 육 인용.


싱글침대와 이케아에서 주문한 흰색 행거 하나면 꽉 차는 방에 협탁처럼 들어간 책상을 대신하던 육 인용 식탁에서 우리는 밥을 먹었고, 배달 음식의 비닐 포장지를 텄다. 겨울이면 버너 위에서 전골을 끓였고, 여름이면 찬물에 헹군 메밀을 겨자를 푼 장국에 푹푹 찍었다. 거북목을 예방하겠다고 산 삼단 독서대의 목은 몸의 하중을 실어 무릎으로 내리눌러야 간신히 접혔는데, 언제나 식탁의 한 편에 놓여 있었다. 한 끼를 먹고 식탁을 행주로 한 번 훔치고 나면 이제 독서대가 밥공기의 자리에, 수저와 젓가락의 자리에 왔다. 


네 개의 의자 중 우리는 주로 부엌과 가까운 의자 두 개에 마주 앉았다. 가끔 둘 다 꺼내 놓을 짐이 많은 날이면, 교차로 앉아 서로의 노트북을 켰다. 내 자리는 거실벽을 마주하는 자리로, 앞에 동거인이 앉아 있지 않으면 집주인이 깨끗하다고 주장했으나 차마 지우지 못한 커다란 얼룩이 보였다. 사람의 뒷모습 같은 얼룩. 이 얼룩은 이 집에서 전에 거주한 세입자의 ‘것’이었다. 전 세입자는 중년 남성과 젊은 부인이었는데, 집을 보러 왔을 때 부인은 막 태어난 갓난쟁이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룩 앞에는 등받이 없는 스툴이 있었으니, 나와 동거인은 그 얼룩의 정체를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위의 작은 동그라미는 중년 남성의 머리일 것이고, 그 밑의 커다란 얼룩은 중년 남성의 등일 것이라고. 사람의 몸에서 벽지의 종이로 몇 년간 스며든 기름때를 무엇으로 닦아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은 채, 우리는 시시때때로 알코올이 함유된 소독제를 뿌리고 그 자리를 물티슈로 뻑뻑 문질러보았다. 

 

이따금 동거인이 없는 집에서 나 혼자 식탁에 앉게 될 때면, 나는 언제쯤 그가 이 집을 떠나게 될까, 그의 신체였 피부와 기름때가 이 집에서 비켜날까 궁금했다. 이 공간이 언제 내 것이 될까. 그럴 때면 의자를 잡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사람이 앉으면 안 흔들리는 의자를 잡고, 안 흔들리는 의자를 보고,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식탁은 육 인용이고 의자는 넷이고, 사람은 둘인 집에 내가 살고 있다고. 

 

 

 

‘나’의 집, ‘나’의 공간



‘나’가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가 존재해야 한다.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가 실재해야 한다. ‘나’가 실재하기 위해서, ‘나’는 의자를 안 흔들리게 해야 한다. 의자를 안 흔들리게 하는 ‘나’는 식탁에 앉아서 수저를 들고 밥을 먹는다. 밥도 먹고, 책도 읽는다. 책도 읽고 글도 쓴다. 글도 쓰고, 맥주도 마신다. 맥주도 마시고 동거인과 이야기도 한다. 동거인과 대화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과거의 경험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재를 구성한다. 구성된 현재는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며 ‘나’에게 쏟아진다. ‘나’의 현재에 동거인의 하루가 침입한다. 동거인이 오늘 관람하고 온 뮤지컬, 오늘 자기 친구와 나눈 대화, 오늘 읽은 글, 오늘 한 생각이 ‘나’의 현재를 교란한다. ‘나’의 하루와 타자의 하루가 마주치며 서로를 오염시킨다. 오염은 양방향의 얽힘이다. 그러니 오염의 반대말은 청결과 순수가 아니라 고립이다. 중년 남성의 얼룩이 오염이 되지 못하는 까닭도 이곳에 있다. 그의 얼룩은 타자의 물화로, 나는 그가 남긴 ‘그것’을 보지만 ‘그것’이 된 그는 나를 보지 못한다. 일방향의 응시는 오염될 수 없다. 그저 ‘나’와 단일한 ‘그것’으로 있다. 나만이 그것에게 위협을 느끼며, 있다.


타자가 나에게 개입하는 순간, 타자의 주체성을 느낀 나는 ‘제대로 나’임을 안다. 대상화된 주체를 바라보는 주체로서 ‘나’와 주체가 개입하는 순간 타자가 되는 ‘나’와 그 둘을 동시에 인식하는 ‘제대로 나’. 

 

우리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있다. 의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식탁을 채울 때도,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이 무가치하다는 회의감이 식탁에 쏟아질 때도, 한 시간째 다 먹은 빈 그릇만 바라보며 빈 그릇도 못 치우는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녹아내릴 때도. ‘나’의 존재가 바닥에 떨어진 나의 머리카락보다 가볍고, 중년 남자가 두고 간 얼룩보다도 옅다고 느껴질 때도, 내가 앉은 의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식탁으로 가자. 허기로 포장된 공허를 채우자. 먹지 못하는 것은 읽지 못하는 것, 생각하지 못하는 것, 쓰지 못하는 것, 그리하여 언어를 잃은 것, 사회에서 일 인분의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 일 인분을 먹지도, 일 인분을 하지도 못하는 잉여의 레디메이드가 되는 것. 그 대신에 안 흔들리는 의자에 앉자. 우리의 식탁에서는 밥도 글자도 모두 먹어 치운다. 수저 대신 손으로, 입 대신 눈으로 받아먹을 글자 낱알을 한 술 깊게 퍼 담는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아름다운 글자 낱알들로 오늘의 마지막 술을 뜬다.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이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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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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