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닳아버리지만 않는다면 삶은 계속 될 테니 - 시선으로부터 [도서/문학]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사람에게 이미 지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건네는 응원
글 입력 2023.07.0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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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책 소개에 앞서 작가의 말 중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의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하고 싶다. 이 책은 20세기를 살아낸 ‘심시선’이라는 인물에게서 뻗어 나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서 심시선의 조각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가장 먼저 만나는 심심한 반전은 제목 시선으로부터의 ‘시선’이 우리가 누군가 바라볼 때 건네는 시선이 아닌, 인물 심시선의 시선이라는 점이다. 20세기 한국에서 태어난 보편적인 여성과는 다소 다르게 살아온 심시선과 그의 자녀 그리고 손자, 손녀까지 이 책은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3대에 걸친 인물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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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에 걸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보니, 이 책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심시선답게 가계도도 평범하지 않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이었던 요제프 리와의 결혼에서 얻은 명혜, 명은, 명준과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데려온 경아가 심시선의 첫 번째 가지이다. 두 번째 가지는 심시선의 손주이자 명혜의 딸인 화수와 지수, 경아의 아들과 딸인 규림과 해림이다.

 

비범했던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사람들답게 그들 역시 시선의 일부를 닮았고 또 닮지 않았다. 이 책은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사람에게 이미 지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건네는 사랑이 담긴 안내서이자 응원이다. 동시에 지난 세상의 삶을 버티고 살아낸 사람에게 현 시대의 사람이 건네는 존경이다.

 

 

 

좋은 사람도 나쁜 일을 당한다



심시선의 인생은 보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나쁜 일 투성이다. 어린 시절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쫓겨나듯 하와이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만난 예술가인 마티아스 마우어에게 젊은 시절을 착취당한다.

 

첫 번째 결혼은 실패로 끝났으며, 두 번째 인연과는 상대방의 사별로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 ‘애방’ 역시 일찍 목숨을 잃었으며, 애방 뿐 아니라 심시선 주변의 수많은 예술가들의 죽음을 그녀는 목도해야만 했다. 또한 그녀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마우어에 의해 원치 않은 이미지로 미디어에서 소비되었다. 

 

심시선이 겪은 일들이 그녀가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심시선은 그녀가 겪은 일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좋은 사람에게도 나쁜 일을 찾아오기 마련이므로. 그녀가 살아낸 삶은 그 자체로 나쁜 일에 굴하지말고 꼿꼿이 살아가라는 응원의 메시지이다. 

 

그녀가 삶에서 마주친 나쁜 일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느슨한 위로를 준다. 반드시 힘을 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스러운 응원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온 나쁜 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위로. 우리 또한 심시선처럼 우리를 찾아온 나쁜 일을 경쾌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대할 수 있다는 응원도 함께.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마십시오



직장에서 겪은 염산 테러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힘들어하는 화수는 피해자인 자신보다 가해자를 더 이해하려고 하는 세상에 대해 분노한다. 책임을 지지 않고 자살한 가해자에 갈 곳을 잃은 분노는 그녀를 더 파고들었다. 무뎌지지 않는 분노는 그녀를 오래 힘들게 했다. 동시에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세상이 원하는 틀에 맞춰 가지런하게 살아온 그녀는 이제는 세상의 일그러진 면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 볼 수 있다. 더 첨예한 눈으로 세상의 어둠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그녀는 자신의 회사가, 세상이 경각심을 가지길 원하며 직장에 복귀하기로 한다. 나쁜 일과 세상에 닳아 없어지지 않고 아주 작은 흠집이라도 내기 위해서다.

 

경아는 경력 단절이 쉬운 업계에서 ‘대충 희망’이 되기 위해 임원 자리에서 버티기로 한다. 업계에서 일궈낸 작은 세상을 그녀 스스로는 대충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바뀌지 않는 세상에 닳지 않고 그녀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경아는 길을 뒤따르는 사람들의 희망일 수 있었다.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의 끝은



해림과 규림 그리고 우연은 자신들이 시선으로부터 나온 가지의 끝일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경아가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지만 심시선의 첫 번째 가지이듯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는 비단 책에 등장하는 그들 뿐만이 아니다. 심시선의 삶의 조각을 가지게 된, 이 책을 읽은 우리 모두가 시선의 가지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심시선처럼 지난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삶 그 자체를 통해 건네는, 다소 퉁명스럽지만 애정 어린 응원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닳아 본인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심시선의 삶을 엿보라고 권하고 싶다. 분명 그녀의 인생으로부터 큰 위로와 응원을 받을 수 있을테니.

 

 

[국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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