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이 꺼진 자리에 남은 그을음 - 연극 육쌍둥이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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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한때 자주 쓰이던 문장이다. 욕심을 부려서 큰 화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실수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욕심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비슷하다. 채워봤자다. 왜냐면 욕심은 또 다른 욕심을 낳기 때문이다. 욕심은 커지면 커졌지 대체로 줄어드는 법이 없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욕심과 관련된 관용어구를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왜 이렇게 욕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을까?심리학에서는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이야기한다. 즉, 욕망은 우리의 dna에 내재되어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욕망을 동력 삼으면 건설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을 좇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 끝내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과욕은 금물이라는 말처럼, 욕심이 과하면 필연적으로 화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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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왕의 열렬한 지지 덕분에, 콜럼버스는 1492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다. 이제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아메리카에 발을 딛은 그가 과연 존경스러운 탐험가냐 묻는다면, 필자는 그렇게까지 박수 받아 마땅한 위인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답할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 않은가. 철저하게 유럽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문장으로 배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콜럼버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콜럼버스의 발견 덕에, 아메리카에 신문물이 들어서면서 문명에 한 걸음 나아갔다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적었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을 조명한 문장은 현대로 넘어오고 나서 많아지고 있다. 원주민들은 콜럼버스 때문에 평화롭던 일상은 물론이고 목숨과 가족 나아가 국가를 잃었다. 직접적인 학살 뿐만 아니라, 구대륙에서 건너간 바이러스로 인해 대륙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탐험가의 손에 발견된 뒤로, 200년만에 토착민 95%가 사망한 일을 위대한 발견으로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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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용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목이 터져라 울부짖던 주민들과 재개발을 추진하던 반대편 사이의 충돌이 그것이다. 주민들은 거세게 반대했지만, 공권력과 맞서 싸우기에는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 2009년 1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점거 농성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건물에서 농성자들과 경찰 및 용역업체 사이의 대치 과정 중에 화재가 발생한다. 건물의 꼭대기에 있던 망루가 불길에 휩싸이며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바로 이 사건이 "용산 참사"라고 불리는 용산4구역 망루 철거현장 화재 사건이자 연극의 모티브가 된 이야기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연극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가슴 아픈 참사를 그리스 비극 구성을 가져와 현대적으로 해석한 창작극이다. 인간의 욕심을 불에 빗대어 선함과 탐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예술단체 즉각반응은 2022년에 창단 10주년을 맞아, 2014년 초연된 그들의 [현대시리즈] 1탄인 <육쌍둥이>를 8년 만에 다시 선보인 바 있다. 2023년 여름, 일년 만에 다시 육쌍둥이가 들려주는이야기는 과연 관객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연극 <육쌍둥이>
공연 시작 10분 전, 관객들이 차례로 줄을 서서 질서정연히 입장을 시작한다. 제 자리를 찾아 하나 둘 착석하는 사람들 사이로, 무대 위에 벌써 연기를 시작한 배우들이 눈에 띈다. 육쌍둥이 중 한 명으로 보이는 남성은 기저귀를 입고 리어카에 걸터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다. 공허한 눈빛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은,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는 옷차림은 그가 어딘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남성의 옆에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있는 자유분방한 파마머리의 중년의 여성이 보인다. 갑자기 웃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하는 여성의 그로테스크한 모습 너머로 언뜻 비치는 슬픔. 극 시작도 전부터 관객으로 하여금 다양한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이윽고 어두워지는 조명과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빗소리 사이로 무대 위에 있던 중년 여성의 나레이션이 시작되면서, 관객들은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 소녀와 소년의 사랑으로 아름다운 생명이 탄생했다. 그것도 동시에 6명이나. 당연히 소녀와 소년은 부양할 여력이 되지 않았고 그렇게 여섯의 갓난 아이는 길거리에 버려진다. 그렇게 생을 마감할 뻔 했으나, 육쌍둥이는 한 고물상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다.
그때 그들이 발견되었던 것은 과연 행운이었을까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고물상은 아이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예뻐해주기는 커녕 폭력을 일삼았고, 여섯 아이를 동등하게 아껴주지 않았다. 쌍둥이들 입장에서는 친부라고 생각했던 아비에게 불만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 그렇게 육쌍둥이는 커가는 과정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된다. 끝까지 고물상 곁에 남아있던 아이는 오프닝에서 관객의 이목을 끈, 리어카 위의 사나이인 여섯째 '조진내' 뿐이었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던 성인이 된 육쌍둥이는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바로 아버지인 고물상이 죽었다는 소식. 그 편지 덕에 이들은 아주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이게 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성인이 된 육쌍둥이는 우스꽝스럽기도, 기괴하기도 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에는 새빨간 표식이, 하의 대신에 기저귀를 차고 있다. 이름은 또 얼마나 요상한지. 함화자, 박수처, 이기라, 신기해, 최고야, 조진내... 처음 듣고선 귀를 의심했다.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 배에서 열 달을 함께 보낸 사이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캐릭터가 뚜렷한 어른이 된 여섯명의 아이들은 집을 나온 순간부터 각자 너무나도 다른 여정을 걸어왔음을 짧은 대화를 통해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면의 불, 즉 욕망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극은 욕망의 불꽃과 함께 죽은 고물상과 끝까지 같이 살았던 막내, '조진내'의 품 속에서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다. 가난뱅이인줄만 알았던 고물상의 부동산의 재개발 소식과 더불어 고물상에 대한 사랑을 '조진내'에게 입증해야한다는 유언장 내용에 쌍둥이들의 태도는 180도 바뀌게 된다.
이전까지 자기가 제일 힘들었다고, 아버지에게 가장 많은 미움을 받았다고 성토하던 이들은 앞다투어 '조진내'에게 아버지에 대한 억지 사랑을 쥐어짜낸다. 배우들의 얼굴은 빨간 불꽃으로 뒤덮여가고, 코믹하게 억지 사랑을 연기하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면서도 어딘가 모를 씁쓸함을 안겨준다.
결국 번져가던 불은 끝내 모두를 집어 삼킨다. 모두에게 번져간 불은 절대 꺼지지 않았고, 불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을음만이 그들이 있었음을 상기시킬 뿐.
내 안의 불... 꺼주세요!
필자는 공연장 맨 앞 줄의 프롬포터 앞 좌석에서 극을 관람했다. 자막 해설을 지원하는 회차에 관람한 덕분에 대사를 한 줄 한 줄 명확하게 짚어가면서 극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등장 인물의 분장도 재밌었다. 욕망을 불꽃에 비유하여 그 불꽃을 얼굴에다가 그려 시각화한 모습이 처음에는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이내 익숙해져 극에 몰입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로써 작용했고, 기저귀 또한 등장인물들간의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유대감을 표현하는 장치로써 제 몫을 다했다.
부끄럽게도 이번 연극에서 "용산 참사"를 처음으로 접했다. 어떤 사건이길래 연극으로 남겨서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회자되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기사와 뉴스 등을 찾아 보았다. 이해관계로 인하여 발생한 국가와 국민의 입장 차이와 그에 따른 대립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정당화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 사건을 알아 보면 필자가 가장 가슴 아팠던 부분은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과 거대한 자본의 힘이라면 무엇이든 안 될 게 없다는 것이다.
극을 관람하면서 현실을 참 잘 녹여냈다고 생각한 부분도 이와 맞닿아 있다. 고물상의 땅이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소식에 내면의 욕망이 발현되면서 서로를 물어 뜯던 쌍둥이들이 일제히 막내, 아니 죽은 양아버지를 향해 '눈물의 아부쇼'를 하는 모습과 형제들을 죽이고도 욕망이 채워지지 않아 겁내던 조진내가 양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욕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어 역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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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초기 진압이 아주 중요하다.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점점 번져서 그대로 하늘 높이 치솟는다. 규모가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과학 수사를 통해 발화 시점이나 발화 요인을 알아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사건을 교훈 삼아 똑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게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욕해도, 외양간을 그대로 두는 일은 반드시 없어야 하니까.
육쌍둥이를 점화시킨 것은 무엇이었나. 어린 시절의 환경이었을까, 갑작스레 다가온 재개발이라는 달콤한 과육이었을까. 그보다도, 육쌍둥이가 불길에 휩싸여 시커먼 재가 될 때까지 보고만 있던 우리에게는 과연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누가 가해자인가. 필자의 가슴에 불을 지핀 연극 <육쌍둥이>가 남긴 그을음에서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뒤, 꺼지지 않는 내 안의 불을 꺼달라고 울부짖던 조진내의 음성이 자꾸만 들린다.
[강윤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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