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같은 하늘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 [영화]

영화 <애프터썬>
글 입력 2023.07.0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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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동진 평론가의 독서 방법을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욕조에 몸을 전부 담그고 책을 읽는 것이다. 욕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아오이(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주말에는 욕조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한 시간 내지 길면 두 시간 동안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애프터썬’은 마치 두 부녀와 함께 튀르키예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름 냄새와 짭조름한 바다의 맛을 느끼며 퉁퉁 불려진 몸.


영화나 소설을 읽으면 끔찍이도 나를 투영하는 편이다. 이런 걸 과몰입이라고 하던가. 소피의 모습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꺼내 들었다. 그녀만 한 나이에 나 역시 부모님이 이혼했으니 누구보다 빠르게 감정이입이 가능했다. 비록 두 부녀처럼 튀르키예 여행을 다녀온 적도, 둘만의 추억을 쌓는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애프터썬은  카메라와 캠코더를 이용하여 여행을 기록하면서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함께 여행 중인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튀르키예의 강렬한 햇빛이 화면 너머 내 얼굴까지 전달되는 것처럼 생생했다. 평범한 여행 영화인줄 알았으나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소피는 어엿한 가정을 꾸린 어른의 모습으로 시시때때로 울어대는 아이를 육아하는 부모가 되어있다. 캘럼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소피가 추억하는 어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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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와 캘럼은 부녀라기보다 절친한 친구에 가까워 보인다. 흔히들 가깝고도 먼 사이라고 불리는 아버지와 딸이지만 캘럼은 소피의 담당 선생과 학교 생활을 꿰고 있으며 짓궂은 말장난이 오고 갈 정도로 관계는 무탈한 것처럼 보였다.


여행 중 소피는 캘럼에게 엄마에게 왜 사랑한다고 말하느냐 묻는다. 가족이라는 유일한 연결점이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순간마다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소피는 작렬하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어 대신 같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가 같은 하늘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 그럼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같은 하늘 아래 아빠랑 내가 있는 거니까.


같은 장소에 함께 지내지 못하는 주제에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라며 소피를 설득시키려는 캘럼의 말은 알맹이 없는 과육처럼 느껴진다. 사랑이 있는 한 지속되는 울타리일 수도 있겠으나 어린 소피에게는 깨진 조각처럼 완전하지 않은 관계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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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신청한 거 아니지?"

"당연히 내가 했지. 5살 때부터 했잖아."

"이젠 이거 하기에 좀 늙은 거 아니니?"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소피와 캘럼의 장기자랑씬이었다. 두 부녀는 소피가 어릴 적부터 여행을 다녔고 그때마다 여행지에 열리는 장기자랑에 참여했다. 당연하게도 참가하려는 소피에게 캘럼은 화를 내다시피 거절하고 만다.


홀로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선 소피의 노래 실력은 끔찍했다. 이때 소피가 부른 R.E.M. 의 노래 가사가 눈에 띄었는데 마치 소피와 캘럼의 현실을 반영하듯 사실적이었다. 제가 아무리 다가가도 당신 눈에 거리감이 느껴져요. (R.E.M. - losing my religion) 캘럼은 그저 가늠할 수 없는 얼굴로 소피의 무대를 지켜볼 뿐이었다.


대개 부모는 자식이 커가는 속도를 통감하며 서운해하는데 캘럼은 본인에게 닥친 시간의 흐름에 어쩔 줄 몰라하는 느낌이다. 장기자랑만 해도 이제 자신은 어린 나이가 아니라며 거절하는 쪽이 소피여야 했다. 보통은 그랬다. 자신 보다 한참 어린 소피가 캘럼을 달래고, 그가 노래하지 않겠다며 버럭 내지르는 장면은 오히려 소피의 의젓함을 돋보이게 했다.


영화 초반에는 소피에게 이입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캘럼의 입장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소피에게 아빠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현실과 달리 그녀 모르게 눈물을 쏟아내는 캘럼의 깊은 내면에 묵묵히 자리하고 있던 우울의 감정을 대면한 것 같아 아팠다. 아이처럼 엉엉 울며 무너져내리는 캘럼을 보며 부모이기 전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슬픔이 보였다.


캘럼의 시간은 어디에 있을까. 스쿠버다이빙을 위해 옷을 환복하는 배 위에서 같은 처지의 남성과 나눈 대화 내용에서 그는 여전히 부모로 가는 길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40살은 넘어야 아빠가 될 줄 알았지만 자신의 40살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채로.

 


[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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