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무 의미가 없다면, 있는 것으로 족해요 - 연극 '보존과학자'

존재함만으로 의미는 생겨나니까요
글 입력 2023.06.1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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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을 좋아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일 신화들, 역사적인 유물들, 근세 이전 미술 양식들…. 미래적인 디자인이나 화두에도 관심이 가지만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들은 오랜 시간 속에서 굳건히 버텨온 것들이다. 그 오랜 시간을 버텼다는 것만으로 왠지 경외감이 든다. 요즘이야 날로 발전해나가는 의료 기술 덕에 백 세 시대를 넘어 백 이십 세까지도 살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시대지만-물론 이것도 기후위기 때문에 어찌 될지 알 수 없긴 하다-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 백 살도 채우기 힘들었던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들이 훨씬 더 긴 시간을 지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먼 옛날의 삶의 방식과 지혜와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보존된 만큼 앞으로도 존재하게 돕고 싶다. 문화유산이야말로 인류의 정체성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람은 감정만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복원, 보존 기술이 필요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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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존과학자>가 그리는 먼 미래에도 옛 유물의 복원과 보존을 소명으로 삼는 보존과학자가 있다. 아득히 먼 미래, 갖은 재난과 재해로 사람도, 물자도 지극히 희귀해진 세상이다. 인류로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보존과학자1은 폐허나 다름없는 지구에서 유리, 철, 알루미늄이 의인화된 전문가들과 상의하며 수장고에 있는 약 천 년 전 유물을 복원한다. 보존과학자1이 ‘다음 전시의 메인 작품’으로 점찍은 것은 오래된 텔레비전이다.

 

물론 이 복원작업은 쉽지 않다. 재료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어서 다른 유물의 일부를 동원하기도 하고, 자기 몸의 일부를 내어주기 싫어하는 알루미늄 전문가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보존과학자 1은 텔레비전의 복원 중에 세 전문가들이 던지는 질문에 멈칫하기도 한다. 보존의 의미에 대해, 다른 작품을 희생해서 이 작품을 복원해야 한다면 가치의 위계는 어떻게 정하는 것인지,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 그것은 과연 예술가가 처음 만들어 낸 그 작품이 맞는지 등등. 그럼에도 그가 굳이 이 텔레비전을 복원하려는 이유는 이것이 과거의 저명한 예술가인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에 쓰인 텔레비전 중 한 대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다익선>의 텔레비전을 복원하여 과거 어딘가에 존재했을 작가의 영혼과 의도, 작가의 숨결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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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어딘가에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며 극의 시작에 두 중심인물이 발화한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저기요-. 그 두 중심인물 중 한 명은 미래의 ‘보존과학자1’이고 다른 한 명은 현재의 한 가정에 살고 있는 ‘둘째’이다.

 

각박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몇십 년 동안 일을 하며 가정을 지탱해 온 아버지는 아내와 사별한 후 벌써 몇 년째 텔레비전만을 보느라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 그는 세계 여행을 다루는 방송을 좋아하고, 똑같은 인터뷰 장면을 돌려보고, 텔레비전 속에서 아내의 모습을 찾는다. 

 

슬하에는 세 자매가 있다. 첫째는 경제적 실패 후 집 안에 들어오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원하는 가족이 딱히 없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첫째가 셋째의 대학 등록금을 말아먹고도 여전히 아버지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 만만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예술을 전공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 셋째 역시 아직 자기 길을 찾지 못했다. 

 

세 자매는 자기들만의 문을 찾고 있다. 이미 집을 나간 첫째를 빼고는 문밖 세상에 나가기도 어렵지만, 문 안에 들어가기는 더더욱 어렵다. 세 자매의 모습은 자신을 위한 기회의 문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의심하며 지쳐가는 요즘 세대 젊은이들과 닮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둘째와 셋째는 현실과 타협하지만 생기를 잃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둘째는 잠시 전공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도전을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아는 선배로부터 작품 관리 보조 일을 소개받게 된다. 일정 수입은 들어오지만 한때 예술가를 꿈꿨던 둘째로서는 두 번째 일이 심리적으로 더 힘이 들었을 게다. 변변한 직업이 없었어도 늘 한강 근처를 뛰어다니는 등 건강했던 셋째는 아버지가 밖에 나가 경제활동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더 확고해지자 재개발 현장에서 문을 부수고 다니는 일을 하게 된다. 뭔가를 만들고 싶은 욕구를 느끼면서도 자신은 그럴 주제가 못 된다고 느끼며 직접 만든 물건을 제 손으로 부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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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가족에게 있는 것은, 삼십 년 전에 지어 셋째와 같이 나이 먹어 가는 오래된 집 뿐이다. 첫째는 그 집터에서 건물을 새로 지어 세를 받기를 바라며 모처럼 열린 문으로 집에 들어와 자기 계획을 설명하지만 아버지는 집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리둥절한 첫째를 발견한 둘째와 셋째가 다소 황당한 말을 한다. 아빠,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가셨어. 

 

이 무슨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소리인가 싶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다시 시간이 교차하여 미래의 지구가 배경이 되었을 때, 보존과학자1과 세 물질 전문가들은 텔레비전 속에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드디어 복원해내기에 이른다. 사람 형태를 한 그 존재를 보고 보존과학자1은 그가 백남준의 일부이기를 바라지만, 이는 텔레비전에 들어간 과거 한 가장,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평범한 가장이었다가 텔레비전과 융화되어 자기 아내를 찾아다니다 수장고에 잠들게 되었던 한 존재이다. 

 

한 톨이 아쉬운 자원을 쓰고, 이 텔레비전을 복원하기 위해 수장고 내 다른 작품도 희생시킨 보존과학자1은 좌절한다. 내 행동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더이상의 보존활동을 그만두기로 한 보존과학자에게 텔레비전의 일부가 되었다 다시 꺼내진 아버지는 위로를 건넨다. 의미가 없으면 안 되는 건가요? 그리고 보존과학자에게 손을 내밀어 손을 잡기를 요청한다. 마임을 하며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 조성에 힘쓰던 배우들이 그 손길의 전달을 동작으로 이어나간다. 전해진 손길은 보존과학자1에게 가닿고 그녀는 자신이 발굴해 낸 존재의 손을 잡는다. 

 

그때 서로 별개로 비춰지던 현재와 미래 사이에 모종의 문이 열린다. 아버지가 들어간 텔레비전을 자신이 관리하는 작품 수장고에 몰래 옮겨 둔 둘째와 보존과학자1이 만나게 된다. 한 사물의 보존을 의도한 첫 번째 사람과 마지막 사람이 마침내 만나게 되는 셈이다.

 

 

[국립극단]보존과학자_홍보사진04.jpg

 

 

둘째가 텔레비전을 수장고에 두고 우리 부모님의 일부는 계속 재생되고 보존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나서, 자매들은 각자의 방향을 찾아 흩어지게 된다. 마치 자식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다.

 

길이 아니라 방향이라 표현한 이유는 자매들이 여전히 확고한 목표나 수단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는 집으로 돌아간다. 새 집을 짓든, 그 집을 계속 유지하든 간에 집은 그 집에서 사는 사람, 최소한 집을 가끔 둘러보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허물어지지 않는 법이다. 생각해보면 계속 집에 들어가고 싶어하던 첫째였으니 그의 문은 그가 자랐던 집의 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집 내부에 돈을 뜯어낼 아버지가 계시는 것도 아니고, 그 집을 혼자서 해먹을 생각도 없다고 하니 '뭔가 해먹을' 의도가 사라진 후에야 첫째는 집이라는 우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셋째는 자기 문을 자기가 만들겠다며 떠난다. 무대 중앙에 있던 문 앞에 기대어 자기가 만든 것을 만지작거리다 제 손으로 부수고 마는 과거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둘째는 그런 셋째에게 더 고민할 것도, 엮일 것도 없이 자유롭게 가라며 등을 돌리고 앉아 말한다. 둘째의 바람대로 셋째는 미련없이 떠난다.

 

둘째가 가기로 한 방향이 제일 아프고 씁쓸했다. 그는 더이상 아등바등하지도, 세상에 자기 자리를 요구하지도, 돈도 벌지 않으며 그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겠노라고 세상에 대고 일갈한다. 바로 그때에 미래의 보존과학자와 만나게 된 것이다.

 

방금까지 절망에 빠져 있던 보존과학자지만, 위로의 손길을 받았던 그는 그 위로를 둘째에게도 전한다.

 

모든 게, 의미가 있어요.

 

비록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현대인의 질문에 속시원히 답해 줄 수 없기는 미래인도 마찬가지지만 둘째의 행동에 텔레비전은 보존되었고 아버지의 위로는 시간을 돌고 돌아 보존과학자의 말과 눈빛으로 둘째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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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시작에 어딘가에 그저 누군가 있기를 바라며 저기요-하고 서로를 부르던 두 사람이 만남이 기적같이 이루어졌다. 누군가의 있었음이 보존과학자에게 위로가 되었듯 누군가의 있음이 상처받은 둘째에게도 위안이 되기를 바라게 되는 장면이었다. 아무리 스스로 선택했다고 여겨도,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피폐하게 한다. 생계의 전선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까지 너무 오래 물러나 있지 않기를. 삶은 너무 무겁지만 그래도 내가 칠해나갈 수 있는 나만의 그림이기도 하기에, 둘째와 둘째로 대변되는 청년들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하나라도 더 느낄 수 있기를 소망했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이니까.

 

보존과학자1과 유리, 알루미늄, 철 전문가, 그리고 세 자매의 아버지였던 텔레비전 속 존재는 자매들과 한바탕 춤을 추고 난 후 곧 있을 미래의 종말을 의연하게 맞이한다. 그들이 그들의 시간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을 끝까지 다 누렸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의 마지막을 암시하듯 새하얗게 점멸하는 조명 아래 보존과학자1은 말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보존의 의도는 결국 기억에 있다.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이지만 닿는 데까지 힘써 기억되게 만들면 더 오래 생을 누리는 듯이 느껴진다. 적어도 그런 바람을 담아 글, 그림, 영상과 각종 자료들, 물건들을 남기고 보존한다. 후대에 남기는 행위뿐만 아니라 선대가 남긴 것을 보는 행위도 의미가 있다. 먼저 간 사람들의 흔적을 볼 때면 우리는 억겁의 시간을 그저 스쳐지나는 티끌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있었고, 있으며, 앞으로도 있기를 바라며 좋은 것을 추리고 쌓아둔다. 

 

외롭고 불안하고 불확실하기에 영원을 꿈꾼다. 다만 저 보존과학자1처럼 끝의 끝에서까지 기억되기를 저리 말갛게 바랄 수 있을까, 그것은 무슨 마음일까를 생각하며 극장을 나왔다. 모든 것이 끝나기 전 한바탕 춤을 춘 그들처럼 여한 없이 살아보기를 바랄 뿐이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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