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문은 문이다. 게이는 게이다. 타트는 타트다. 전쟁은 전쟁이다. - 연극 몬순

글 입력 2023.04.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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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소설 <신짜오, 신짜오>에는 베트남 사람인 투이네 가족과 한국 사람인 ‘나’의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지만 커다란 사건을 다룬다. 독일에 사는 두 가족은 같은 동양인 정체성을 공유하며 친하게 지낸다. 어느 날의 저녁 식사에서 ‘나’는 독일과 다르게 한국은 단 한 번도 다른 국가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투이 아버지 가족들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였고, 그날의 식사는 파국으로 치달으며 이들 가족은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그 식사 자리에서 ‘나’의 아버지는 내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말을 하는데 “내가 한 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그는 직접 누구에게도 총을 겨누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쟁과 그 상흔 앞에서 누구는 피해자로, 누구는 가해자로만 위치한다면 우리는 전쟁을 평평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단 한 번도 가해자인 적이 없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순간, 어쩌면 그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가까운 베트남에서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하고, 성폭행을 할 때 한국이란 나라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는 거, 무지할 수 있었다는 거. 피해자에게는 우리라는 존재 그 자체가 가해일지도 모른다.

 

 

[국립극단]몬순_포스터.jpg

 

 

연극 <몬순>은 전쟁에 대한 연극이다. 전쟁 연극과 전쟁에 대한 연극은 다르다. 전쟁의 인과관계나 경쟁구도, 포탄의 공포와 폭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심리적으로는 전쟁 가까이에 있지만 물리적으로는 전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먼저 현재 전쟁 중인 삭막한 국가 ‘타트’에서 온 ‘네이지’가 있다. 그는 A국가에 유학을 와서 무기 회사 팀장이자 미혼모인 ‘차미’네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그녀의 아이인 ‘굴’을 돌본다. 차미는 굴을 잘 돌봐주고, 성실히 일하는 네이지를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타트 사람들에 대한 편견적인 말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언제나 한번은 타트의 장례 문화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누다 타트는 죽은 사람을 화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된다. 차미는 묻는다.

 

“그럼 슬플 땐 어떡해?”

“그냥…”

 

네이지와 그들 가족에게는 슬픔보다 생활이 우선일 수 있다. 감정이 둔감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것은 그저 문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차미는 “타트인은 미련하다”는 대사로 상황을 납작하게 만든다.

 

언젠가 네이지는 A국 사람들이 돈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미는 서늘하게 말한다. “그렇지 않아. 우리는 한 번도 뺏겨본 적이 없을 뿐이야.” 이 한마디의 대사를 통해 A국과 타트 사이의 닿을 수 없는 거리와 계급을 보았다.

 

 

[국립극단]몬순(2023)_홍보사진03.jpg

 

 

또 한 명의 타트 출신 안무가 ‘문’은 C국에서 살고 있고, C국 사람인 ‘리오’와 파트너로 함께 살며 가족들도 전부 타트를 벗어나 있다. 때문에 네이지보다는 전쟁에 대한 동요가 덜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문과 리오 사이 폭력에 대한 인식 차이를 보며 어쩌면 문에게도 전쟁의 기억은 뿌리 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가 폭력에 민감한 또 하나의 이유는 동성애자이고, 타트인이라는 이유로 B국 청소년에게 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퀴어퍼레이드에서 선보일 공연의 대본을 쓰는 과정에서 문과 리오의 차이는 크게 드러난다. 폭력의 기억을 잊을 수 없는 문은 대본에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당했던 폭행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담았다. 하지만 이를 본 리오는 “그냥 좀 즐길 수 없어?”라고 말한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폭력에 대해서도 가벼워질 수는 없냐는 말이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리오가 문에게 무척이나 가혹하게 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문, 폭력의 기억을 품은 문은 도저히 가벼워질 수도, 유쾌해질 수도 없다.

 

 

[국립극단]몬순(2023)_홍보사진04.jpg

 

 

또 한 명의 타트인은 B국 교환학생인 ‘코우쉬코지’이다. 그는 전쟁 중인 타트에 할머니를 버리고 왔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이 먼 나라에서 타트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코우쉬코지와 교류하는 사람은 ‘새벽’이다. 새벽은 대학원생으로 졸업 전시에 발표할 미디어아트를 기획하고 있다. 전쟁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그녀는 헬기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보여주고, 이들이 유리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이미지를 통해 전쟁은 유리조각과 같이 멀리 상흔이 번질 수 있는 일이라 말했다. 그런 새벽의 발표를 들은 코우쉬코지는 묻는다.

 

“왜 너희들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나는 이 대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어떤 예술과 연구는 전쟁에 대해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전쟁을 겪은 사람과 위치성이 다른 예술에는 본질적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D국가에 사진 작업을 하러 간 새벽의 남자친구 ‘이삭’은 이러한 상황을 더 명징하게 보여주는데 그는 전쟁 중인 D국의 잔인하고, 불쌍하고, 따라서 기득권의 눈길을 끄는 이미지를 찍기 위해 오래 D국에 머문다.

 

새벽은 유일하게 이름이 한국인 같다는 점에서 B국가는 한국을 상정한 것처럼 보였다. 또 예술을 하는 두 인물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작가 자신의 시선과 문제의식, 전쟁에 대해 말해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한계와 어려움을 드러낸다.

 

 

[국립극단]몬순(2023)_홍보사진05.jpg

 

 

극의 마지막에서 네이지가 차미와 갈등을 빚게 된 이유는 타트에서 온 어머니의 전화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는 네이지 동생이 군인들에게 맞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몬순”이라는 글자가 박힌 우산으로 동생을 때렸다고 했다. 몬순은 차미의 회사였고, 곧 차미 회사에서 만드는 무기는 타트 사람들을 향한 무기였다는 걸 네이지는 알게 됐다. 차미는 네이지가 이 문제에 대해 따지자 자신의 회사는 무기를 만들 뿐만 아니라 게임도 만들고, 사회공헌도 많이 한다며 자신의 회사를 옹호하였다. 그 모습에 네이지는 더 큰 상처를 받고, 차미네를 떠나기로 한다.

 

네이지와 굴은 밤마다 ‘유리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네이지가 떠나는 날 굴을 울면서 말한다.

 

“괴물이 내 안에 있었어요.”

 

연극 <몬순>은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큰 웃음을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아주 매력적이었다. 특히 연극 속 캐릭터인 ‘홀키’는 전쟁 중인 D국 출신인데 연극 속에서 내내 문과 리오의 갈등을 해소해 주는 일에 온 힘을 쏟는다.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보다는 타인을 향한 인류애적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홀키는 이 연극에서 가장 특별하게 보인다.

 

“모자는 모자야.”

 

문을 위로하기 위해 홀키는 말한다. 문은 문이다. 게이는 게이다. 타트는 타트다. 전쟁은 전쟁이다. 이렇게 문장으로 풀어내 보니 정체성과 상처, 사건들을 그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 어렵지만 중요한 일인지를 상기시킨다. 이 연극에서는 홀키의 역할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세계인의 공존과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연극에 등장하는 가족 공동체, 차미와 네이지, 굴이 사는 집이나 문과 리오가 함께 사는 집이 “정상가족”으로 여겨지는 공동체와 풍경이 아니라는 점도 극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A, B, C 세 국가를 오가면서 연작처럼 진행되는 연극인데도 어딘가 어색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놀랍다.

 

점점 풍요로운 국가가 되어가는 대한민국에게 A, B, C국가는 도저히 남 얘기처럼 볼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우리 몸에 괴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몬순은 어떤 나라에서는 바람으로 어떤 지역에서는 비를 동반하며 분다. 전쟁의 상흔은 유리조각처럼 모든 곳으로 퍼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상처와 피해가 다른 이들과 도저히 같을 수는 없다.

 

요즘의 우리에게 이 연극의 이야기와 사유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였고, <몬순>이 일회적인 연극이 아닌 오래 가는 연극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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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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