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를 혼자 보내지 말아요."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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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의 금주 베스트셀러를 구경하다 반가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림책 작가 루리의 『긴긴밤』(2021.02)이다.
재작년 출간 당시 단골 책방 사장님이 마음 담아 쓰신 추천글을 보고 집어 들었던 책이었는데, 어린이 문학을 읽고 그렇게 펑펑 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아직도 베스트 셀러에 올라있구나, 반가운 마음에 최근 소식을 찾아보니 어린이 도서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 이후 발매된 그림책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각종 SNS에서는 신학기마다 늘 대출 중인 책으로 이름을 날리는 중이다.
내 어린 시절에 자리 잡은 동화를 생각하면 어린 왕자, 헨젤과 그레텔, 성냥팔이 소녀, 빨간 모자...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겠다는 호랑이같은 것들이 가득한데, 요즘 어린이들은 진정한 사랑과 연대의 이야기를 읽는다니 다행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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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긴긴밤의 주인공은 여럿인데, 그중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캐릭터가 하나 있다. 바로 흰바위코뿔소 노든이다. 어쩐지 출생의 기억도, 부모도 없이 세상에 나타난 노든은 자신을 돌봐주는 코끼리 고아원 안에서 훌륭한 코끼리로 자란다.
하지만 아무리 노든 자신이 코끼리로 살고 있음에 만족하고, 코끼리처럼 현명하게 생각하려 노력해도 바깥 세상에 대한 궁금증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노든은 코끼리들의 배웅 속에서 푸른 초원을 향해 걷기를 택한다.
혼자서는 코뿔소가 될 수 없었지만 함께라면 가능했다. 아내는 노든에게 자연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했다. 하지만 어느 완벽한 저녁은 잠 못이루는 긴긴밤이 되어 노든을 덮쳤고, 노든은 복수심 하나로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된 외로움”은 노든을 잠 못 들게 하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코끼리 코딱지만한 펭귄 치쿠와의 만남이 그들을 “우리”로 만들었을 것이다.
철조망 안의 동물들과 노든 사이에는 어떠한 감정이 오갔다. 그게 뭔지는 노든도 잘 몰랐다. 그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노든은 더 열심히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반점을 가진 알을 소중히 품은 펭귄과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흰바위 코뿔소 노든의 발걸음은 느리고 무거웠지만 멈출 줄 몰랐다. 치쿠가 생의 끝까지 품어 결국 세상에 태어난 이름 없는 어린 펭귄은 어쩐지 노든의 어렸을 적과 닮아있다. 치쿠가 미처 닿지 못했던 바다를 향해 둘은 쉬지 않고 걷는다. 노든은 펭귄에 대해서는 도통 아는 것이 없었지만 치쿠가 남기고 간 모든 것과 지나온 이야기들을 매일 밤 들려준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노든이 늙고 병들어 더 이상 어린 펭귄의 여정을 함께할 수 없어졌을 때, 어린 펭귄은 자신을 혼자 보내지 말라며 코뿔소로 살겠다 말한다.
하지만 어린 펭귄은 이미 알고 있다. 노든의 바다가 코끼리 고아원을 넘어선 푸른 초원이었듯, 자신도 자신의 바다를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노든이 자신을 영영 혼자 보내지 않을 것임을.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어린 펭귄이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연대와 사랑의 역사는 노든에게, 앙가부에게, 윔보와 치쿠에게, 그리고 이제 이름 없는 어린 펭귄에게 닿아있다.
흔들림 없는 사랑 아래서 자란 어린 펭귄은 어떤 긴긴밤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을 알고 있다. 그 힘의 근거까지도. 이름 없는 펭귄은 어떤 이름보다도 선명한 사랑을 품고 자신의 항해를 떠난다.
일상은 반복되고 지루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고 지난하다. 때문에 삶을 계속하게 하는 힘은 왜인지 대단한 것이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생각보다 쓸모없는 것들에 있다. 이를테면 긴긴밤을 새워 나눈 이야기, 어두운 밤하늘 중 선명히 빚나는 달, 계절의 바뀜을 알려주는 바람, 지나가다 올려다 본 하늘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쓸모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나누는 즐거움이 삶을 잇는 순간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과 연대의 힘을,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기억한다. 늙은 코뿔소와 어린 펭귄이 코와 부리를 맞대듯 너와 내가 눈을 맞추고 살아가고 있음을.
[김윤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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