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토록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주 [영화]

글 입력 2024.03.1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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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조용한 이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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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용산 CGV에서 진행한 말레나 최 감독의 영화 <조용한 이주> 시사회에 다녀왔다. 나는 개봉을 앞둔 <조용한 이주> 이전에 디아스포라 영화를 관람한 적이 있다. 1월에 오피니언을 작성했던 데이비 추 감독의 <리턴 투 서울>과 안소니 심 감독의 <라이스보이 슬립스>이다. 두 영화는 상반된 분위기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달라, 그 각자의 매력과 깊은 여운을 감상할 수 있다. 색으로 빗대어보자면, <리턴 투 서울>은 강렬하지만 가라앉는 짙은 보라색이고,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서툴지만 따스한 노란색이다.


그렇다면 <조용한 이주>는 평온과 억압을 말하는 녹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예고편만 보아도 잔잔한 미장센을 기대하게 되는 영화이다. 나 또한 그러한 것을 예상한 채 영화를 관람하였고, 감독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예상을 벗어난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저 조용하기만 한 영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금은 톡톡 튀는 쇼트의 연결성과 약간의 환상성으로 그 내용의 심도를 더하는 영화였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나는 내가 느낀, 조금은 주관적인 해석들로 <조용한 이주>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조용한 소동: 운석이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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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한 농촌 마을에는 열아홉 살 소년 칼이 산다. 칼은 양부모의 농업을 도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양부모는 그런 칼이 자신들의 농장을 물려받아 가업을 이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사는 마을은 한적하다면 한적하고, 각종 농업기계의 소음으로 시끄럽다면 시끄럽다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처럼 평화로운 덴마크와 칼의 일상에 조용한 소동이 일어난다.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를 운석 하나가 마을에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마을은 그 운석 하나로 시끌벅적해지지 않는다. 오로지 칼의 친척 생일을 위해 모인 파티가 더 중대할 뿐이다. 그날이 칼의 생일을 기념하려 했던 날이었음에도.


그저 칼만이 그 운석에 마음을 써 자신의 방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 그 운석을 숨긴다. 말레나 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운석에 관해 이렇게 언급한다.


 

이 영화는 덴마크 농촌 마을에 자그마한 운석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고는 이 마을에 사는 한국인 입양아 칼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외국으로 입양되는 한국인 아이들은 운석과 비슷하다. 누가 어느 나라에 보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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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은 마치 환상 같기도 하다. 그 정도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마을에 뚝 떨어진 외부의 물체. 그럼에도 이게 왜 떨어졌는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어떠한 모양인지 살펴보지 않고, 그저 ‘이상하네.’하고 마는 것. 이 운석처럼 칼은 친척의 생일파티에서 소외된다. 친척들은 파티에서 와인을 따라주는 아이 중 한 명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칼이 저 아이를 좋아할 것 같아.’라며 지레짐작하고, ‘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배척하고, 인종차별이 담긴 저질스러운 농담을 한다. 하지만 칼은 그 상처와 분노를 조용히 감내한다.


마을에 운석이라는 작은 균열이 일었을 때, 칼의 방에도 조용한 소동이 일어난다. 칼의 방에는 작은 테라리움이 있는데, 이때 칼이 운석을 방으로 가져온 뒤에는 그 멀쩡하던 수조가 흐트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수조는 칼의 방과 동일시된다. 칼의 방은 연두색 벽지와 식물이 있어, 마치 테라리움을 연상하게끔 한다. 그렇기에 감독은 칼이라는 한 인물 속 내면의 소동을 수조에 비스듬히 처박힌 조명으로 나타낸다. 조용한 균열이다.

 

 


녹색: 억압이기도 해방이기도 한



녹색은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탁 트인 산의 전경과 울창한 숲을 보며 시원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가끔 녹색에서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다. 식물원에 가득 차 있는 크고 작은 식물들을 보면, 빽빽하게 들어찬 산의 나무들을 보면 때론 숨이 막히곤 한다. 그들이 나의 숨까지 뺏어가려는 듯해서.


<조용한 이주> 속 녹색도 이 같은 양면의 녹색을 담아내는 듯하다. 언뜻 보기엔 평온한 녹색, 하지만 개개인에 따라 억압일 수도 있는 녹색을.


칼의 방은 평온이 아닌 억압이다. 주변 환경과 스스로가 만들어낸 조용한 억압. 그 이유는 영화 속 곤포 장면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중반부에 곤포 사일리지를 제작하는 장면을 제법 길게 담아낸다. 녹색 작물을 연두색 비닐로 래핑 하는데, 이때 기계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작물을 밀봉한다. 이 장면이 왜 등장했냐 하면, 곤포 이전 장면에서 칼이 양모에게 양모의 ‘친자식’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양모는 칼의 질문을 들었음에도 어떠한 말도, 반응도 없이 칼의 방을 나가버린다.


이처럼 녹색은 말하지 못하는, 숨 막히는 억압을 담아낸다. 밀봉할 수밖에 없는 말들, 꺼내선 안 되는 것들. 친척의 생일파티에서 칼이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양부에게 그때 왜 가만히 있었냐 하여도 큰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넘기는 양부처럼, 칼은 덴마크에서 크고 작은 소외를 느끼지만, 이를 강력하게 표출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 있다.


양모와의 갈등이 있기 전 칼은 한국 여행을 예정하고 있었다. 변한 것 같은 칼의 모습에 양모는 칼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고자 하였고, 칼은 양모에게 혼자서 한국을 가고 싶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도 결국 양부의 질병으로 무산되고 만다. 칼의 여행비를 양부의 수술비로 써야 하며, 농장 일을 칼이 맡아야만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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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방황조차 조용하다. 칼이 침대 아래에 숨겨둔 운석은 산산조각이 나고, 칼의 방 벽면에는 균열이 생긴다. 아무도 모르는 그만의 내적 방황이다. 이내 칼은 말없이 빠르게 자신의 키보다 높은 녹색 풀을 헤치고 나가 운석이 그 몸을 내다 던져 남긴 구멍으로 몸을 숨긴다. 자신을 찾는 양부의 외침을 외면하면서.


그렇게 구멍에서 칼은 상상 속의 한국으로 떠난다. 커다란 산에서 전경을 내려다보면 그곳은 서울 도심이다. 산에서 내려가면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녹색 마을버스가 지나는 버스정류장을 거쳐, 시장에 가 공짜로 주는 음식도 먹는다.


이렇듯 칼은 녹색 잔디에 난 ‘균열’이란 구멍에서 잠시나마의 해방과 평온을 느낀다. 가고 싶었던 세계, 나의 또 다른 집이기도 한 어딘가 정겨운 한국. 비록 그것이 상상뿐일지라도 한국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조용한 이주: 마주함에 대해


 

한국의 시장을 둘러보던 칼은 장을 보는 한 여성을 본 뒤, 홀린 듯 그녀를 뒤따라간다. 그럼 그녀는 뒤돌아 칼을 마주 본다. 이때 그녀의 얼굴은 칼과 닮아있다.


말레나 최 감독은 "사람이 자기 역사에 접근할 수 없다면 상상으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자기 과거를 알 수 없는 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기 속에서 (상상으로) 그것을 찾아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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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기반으로 나는 영화 중반부 양부모와의 식사 자리에 등장한 중년 여성의 환영이 칼이 상상할 수 있는 친모의 모습이리라 생각하게 된다. 비록 그 모습이 서양인이었으나, 나는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칼은 그 환영과 조용한 몸짓으로 마음의 풍족함을 나눈다. 잠시뿐일지라도 따스한 미소와 함께.


칼은 살아오며 양모 나이의 동양 여성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가 자라며 봐온 것은 농촌 마을에 사는 덴마크인들이다. 하물며 칼의 농장에 농업 체험을 온 이조차 서양인이었다. 칼은 자기 역사에 접근할 수 없는 환경에서,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모친의 모습을 떠올렸을 테다. 그것이 양모와 비슷한 모습을 한 환영이었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칼은 상상 속 한국 여행에서 자신과 닮은 모습의 친모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상의 세계일 뿐이지만, 그곳은 칼의 내적인 또 다른 거주지가 된다.


이후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나는 울음소리(아이가 ‘엄마!’라고 외치는 소리와 농장의 새끼 젖소의 ‘음메!’하는 소리가 이어지며 덴마크로 돌아온다)와 함께 칼은 구멍에서 나온다. 그리곤 양부에게로 가 자신은 농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양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한 칼을 안아준다.


칼에게는 두 곳의 거처가, 그리고 조용히 두 곳을 이주할 수 있는 통로(구멍)가 생겼다. 칼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진심과 슬픔을 감내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칼은 덴마크와 한국, 두 나라를 품은 주체적인 인물로 조용히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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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서 감독은 "칼의 삶은 덴마크의 공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양부모가 한국에 가 그를 선택한 게 아니다"라며 "어떤 의미에서 칼은 (운석처럼) 우주에서 온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비단 해외입양인뿐만 아니라, 슬픔과 분노를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모든 이에게 잔잔한 용기를 부여한다. 나를 외부적인 존재로, 소외된 존재로 만들었던 운석이지만, 그 운석을 마주하고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길 응원한다.


천체사진가 권오철 작가의 말이 있다. “어차피 인간은 우주 먼지거든요. 어차피 우주 먼지라면 행복한 우주 먼지가 되자.” 이 말을 들은 이후, 나의 스마트폰 상단바에는 “행복한 우주 먼지가 되자!”라는 문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이 세상 모든 칼에게 말해주고 싶다. 행복한 우주 운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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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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