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뇨끼를 먹으며 하루를 더 살아보기로 했다

우울을 자연스레 흘려보내는 법
글 입력 2023.03.3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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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함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에 찾아온다. 이 녀석은 눈치채지 못한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마음을 파고들곤 한다.

 

하루는 집에 가는 길에 내 몸의 모든 것들이 저 깊은 곳으로 천천히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한없이 가라앉아 버스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가, 내가 이 세상에서 잠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가라앉는 것이 익숙한 나는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오늘 끝마쳐야 할 일도 많은데, 이런 마음가짐으론 더 큰일 나겠다 싶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우울을 떨쳐내려면 그 이유를 찾기보다, 일단 몸을 움직이면서 작은 성취를 해야 한단 걸 어디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밀린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오랜만에 이불도 털어줬다. 깨끗해지고 뽀송해진 집의 공기에 잠시 뿌듯해졌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은 아직도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집에만 있으면 이불이나 덮어쓰고 하루 종일 울겠지 싶어 책 한 권을 챙겨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느 곳으로 향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저녁 6시, 주변엔 사람들이 집에 가는지, 놀러 가는지 바쁘게 움직였다. 그 빠른 군중 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배가 고파지면서 문득 뇨끼가 먹고 싶어졌다. 작년 북촌 골목길에서 우연히 찾았던 이탈리아 집에서 첫눈에 반해버렸던 뇨끼가 생각났다. 먹고 싶은 게 있어 다행이었다. 내 몸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바로 좋아지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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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방의 뇨끼 맛집을 검색해 버스에 올랐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이 지났을까. 하늘의 해는 조금씩 지고 노을이 붉게 타올랐다. 이런 광경을 얼마만에 본 걸까. 붉은 하늘은 그간 내가 얼마나 폰만 보며 살고 주변에 무심했는지 알려주는 듯했다. 내가 찾아간 곳은 평소 웨이팅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이탈리 집이었다. 운이 좋게도 그날은 다행히 자리가 남아있었다. 데이트 장소로 딱인 곳이었기에 혼자 온 손님은 나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주변을 많이 관찰할 수 있었고 공간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식전 빵을 먹고 있자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시금치 크림에 퐁당 빠져있는 뇨끼를 포크로 찍어올렸다. 아직 김이 나는 뇨끼를 호호 불며 한입 베어 물었다. 시금치 크림의 부드러운 향과 소스, 쫄깃하고 따끈한 뇨끼는 마음속까지 데워주는 듯했다. 뇨끼를 처음 맛보았던 작년의 나와 그때의 자유로웠던 나의 일상들이 함께 떠올려지며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한 조각, 두 조각을 소중하게 먹다보니 어느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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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발명품이 아닐까. 이 한 접시가 한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니. 잘 차려진 테이블과 맛있는 음식으로 마음을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나의 기분을 알아챈 언니가 감사하게도 용돈까지 쥐어줬다. 이렇게 즐거울 일들이 주변에 가득한데, 불행해질 이유는 없었다.

 

적당히 부른 배와 적당히 시원한 저녁 공기에 주변 공원을 거닐었다. 아무 벤치에나 앉아서 주변을 구경했다. 동아리에서 왔는지 단체로 배드민턴을 치는 학생들, 지팡이를 짚고 거니는 할머니,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특히 배드민턴을 치는 학생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졌다. 챙겨왔던 책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다. 취업, 학업, 스터디, 알바 여러 우선순위들에 밀려 몇 달간 같은 페이지에 책갈피가 그대로 꽂혀있었다. 참 좋아하는 책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웠다. 좋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나의 마음속 문제들은 이미 저 멀리 떠나있었고 더 나은 기분과 함께 평화로운 기운만이 감돌았다.


진정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고 있을 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우울함이 날 덮친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해야 하는 일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야만 하는 일들, 가면을 써야 하는 일들, 매일 계속되는 도전에 대한 부담감이 나를 조금씩 조여오고 있었다. 자취를 하며 경제적인 압박, 동시에 졸업 후 취업에 대한 압박, 진로에 대한 불투명성 등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나를 매일매일 움직여 한 걸음이라도 더 가게 만들었다. 물론 이렇게 공부를 하며 나를 밀어붙이는 일은 앞으로 커리어적인 면에서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어 좋은 일이고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 살고 있구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쉴 틈이 없는 삶이 한 달, 두 달, … , 반년이 넘게 이어지다 보니 인생의 한 부분들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날은 해야 하는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하고 싶었던 것들로 하루를 채웠다. 공백을 두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즐겁게 노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다. 하고 싶은 일들로 하루를 채우니 조금 숨이 쉬어졌다.

 

나의 플래너엔 To do list가 가득 써져있다. 이 마감기한까지는 이 일을 하고 이날은 어떤 회의가 있고 이날까지는 공부를 끝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되기 위해 스스로 계획한 것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어느새 꿈은 잘 보이지 않았고 내가 해야 할 일들만 남아있었다. 앞으론 해야 할 일 리스트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도 꼭 하나씩 적어두어야겠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뛰어가기 위해서라면.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즐거운 삶을 살고 싶다.

 

 

 

[아트인사이트] 이소희 컬쳐리스트.jpg


  

[이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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