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군가를 살릴 따뜻한 시 -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

글 입력 2023.03.1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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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나'로서가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이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뮤지컬
 

 

10년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결국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시인, 테드 휴즈와의 스캔들로 자기 작품보다 더 잘 알려진 실비아 플라스. 그녀의 작품과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실비아, 살다>가 2023년 재연을 올렸다. 작년에 초연을 올린 이 작품은 신생 공연단체의 창작 뮤지컬 신작이었지만, 뛰어난 완성도로 호평받은 바 있기에 더욱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여기서 실비아 플라스는 섬뜩하고도 잔혹한 스타일의 시를 통해 여성으로서 가지는 격정을 솔직한 글쓰기로 풀어낸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8살 때 겪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9살 때 첫 자살 시도를 하고, 21살에 또 한 번, 그리고 31살에 마지막 자살을 통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죽음 후에야 예술성을 제대로 평가받아 사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작품에서는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여성들이 '죽음이 아닌 삶을 찾아가는 바람'을 말하고자 빅토리아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실비아 플라스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게 하는 팩션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이러한 점은 제목과도 연결됨으로써 자살을 통해 자신을 살렸던 그녀의 생애를 짐작하도록 했다.


그렇게 실제로 마주한 그녀의 삶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안타깝고 애절했다. 당장이라도 무대 위로 달려가 실비아를 안아주고 싶었다. 극에 이입하다 보니 그녀의 감정에 깊이 빠져들어서 녹초가 된 채 나왔던 것 같다. 엔딩 후에도 배우와 관객 모두 훌쩍거리며 한동안 작품의 여운에 잠겨있었던 게 기억난다.


직설적인 화법의 연출은 실비아의 이야기가 피부로 생생히 맞닿게 해주었다. 소극장을 효과적으로 꾸미는 감각적인 색 조명과 음향, 물 흐르듯 진행되는 안무와 넘버, 과거의 인물이 그대로 살아난 듯 실감 나는 연기와 의상, 재치 있는 소도구의 활용 등이 눈에 띄었다. 여유만 된다면 회전문을 돌고 싶을 정도로 다른 캐스트의 호흡은 어떨지 궁금한, 실로 괜찮은 작품이었다.


극의 대표 넘버인 '글은 나의 대체물'부터 역동적인 리듬과 안무의 '술 탄 물', 자신의 희망찬 포부를 드러내는 '그냥 그렇게 난 살고 싶어', 유리종 속 여인의 마지막 외침을 덤덤하게 털어놓는 '벨 자', 엄마를 미워하는 동시에 죄책감을 드러내는 모순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엄마를 배신할 수 없어'까지 귀에 맴도는 넘버가 많았다. 스페셜 커튼콜 위크에는 넘버 하나를 다시 들을 수 있으니 일정을 잘 맞춰 가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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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실비아는 아이큐 160, 어린 나이에 시로 인정받은 천재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작아지는 순간은, 사랑하는 남편 테드와 함께할 때였다. 각종 상을 휩쓸며 승승장구하는 테드와 달리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후 집안일을 하며 시를 집필하는 그녀에게는 차가운 시선만이 머물 뿐이다. 그 당시 사회(1900년대 초중반)는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에 그저 남편과 아이를 돌보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맹렬하게 날뛰는 시는 그저 시간 날 때 쓰는 취미 정도로 치부되어 버린다. 


시는 시행과 운율을 지켜서, 아름답고 세련되게 써야 한다는 아버지와 테드. 시 하나에도 남성들만의 틀을 규정하는 그들의 모습에 실비아는 환멸을 겪는다.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아버지에 평생을 희생당한 어머니를 미워했던 그녀는, 자신 역시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본인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그녀는 시에서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두 사람을 죽인다는 표현을 통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들에 복수한다. 


처음에 실비아는 모든 걸 제 탓으로 돌리고, 주변의 시선에 스스로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곤 했다. 심지어는 자기가 여자로 태어난 게 잘못됐고, 유명한 남자 시인과 결혼한 게 잘못됐고, 그 옆에서 자신을 갉아먹으며 사는 게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의 친구 '빅토리아'가 너는 모든 걸 잘하려고 했고, 모든 건 너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한 사람들의 문제임을 짚어준다. 그 후 테드의 불륜으로 말싸움하던 실비아는 본인이 아닌 당신의 문제니까 스스로 잘못했음을 제발 인정하라며 울부짖는다. 


사실 빅토리아는 실비아의 미래로, 그녀의 과거를 살리기 위해 온 또 다른 자신이다. 빅토리아는 실비아와 기쁜 일과 힘든 일을 함께 나누며 축하와 위로를 건넸고, 그녀의 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봤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끊으려는 그녀를 막아주었다. 실제로 실비아 플라스가 집필한 자전적 소설 < The Bell Jar >의 필명이 빅토리아 루카스였다. 엔딩에서 <벨 자>의 작가 역시 빅토리아 루카스로 표현된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자살하지 않고 살아간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다시 그린 듯해서 인상적이었다. 


원래 실비아는 <벨 자>의 결말을 자살이란 해방을 통해 완성 짓고자 했다. 와인잔이 뒤집힌 모양의 유리종에 붙어있는 한 여인(실비아)은 점점 미끄러지다가 떨어져 갇혀버린 채 쓸쓸한 세상에 홀로 남는다.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국 (자살한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과거의 실비아를 살리기 위해 나타나며 다른 결말이 탄생한다. 


 

이때 빅토리아는 실비아가 살아서 너처럼 추워하는 여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전한다. 


"너의 글은 누군가에게 목도리가 되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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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에서는 열차에 탄 실비아와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가 실비아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실비아는 추운 아이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따뜻한 목도리를 짜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빅토리아의 뜻에 따라 따뜻한 시를 계속 써 내리란 걸 암시하는 듯하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여러모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실비아 플라스의 실화를 적절히 녹여낸 팩션으로서 인물 설정과 엔딩 부분은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보통 공연을 볼 때 몰입도가 60~70%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80~90% 정도라 할 정도로 정말 넋을 놓고 감상했다. 여러 역할을 소화하느라 고통받는 실비아의 모습, 성차별적인 사회, 한쪽을 갉아먹는 연인이나 모녀 관계 등 다양한 장면에서 내가 투영되기도 하고 과거 여성들의 대우가 그려지기도 하면서 가슴이 억눌렸다. 


유리종을 깨고 나온 실비아처럼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줄 글을 써줄 사람이 많아지길 바라며 마친다.

 

 

[최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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