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B(reath)와 D(eath) 사이 : 연극 '슈미'

글 입력 2023.03.1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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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한다.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고. 그런데 이 말을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나. 탄생은 당사자의 바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우선 B의 의미를 확장해야겠다. 살아 숨 쉰다는 생의 의미를 담아 B(reath)로 치환하면 적당하려나. 비로소 생과 멸 사이, 갈림길에 서게 된다. 생명체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테니 이건 선택의 개념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다. 생명의 존귀함을 역설하고 싶을지도. 그런데 주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마땅한 답이 필요하다.


왜 살고자 하는가?


누군가는 명확한 목표를 일컫어 단순 명쾌한 답을 내밀지도 모르겠다. 연극 <슈미>의 주인공 '슈미'가 그중 한 사람일 테지. 신혼여행에서 이제 막 돌아온 슈미. '아내'라는 역할이 생겼고, 남편과 남편의 가족은 '엄마'라는 역할 또한 슈미가 얻기를 원한다. 하지만 두 역할 모두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선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있는 기회의 박탈이기도 하다.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주체성 회복. 그것이 슈미가 삶에서 갈망하는 것이다. 슈미는 자신의 바람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제 연극의 무대가 밝아진다.

 

 

*

아래부터는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슈미 포스터.jpg

  

 

그는 기다란 대리석 위에 누워있다. 천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손은 배 위에 얹은 채로. 부드러운 실크 재질의 옷이 미동 없다. 슈미를 둘러싼 거실의 전경은 차갑기 그지없다. 커튼, 바닥, 스탠드, 화병. 사물들은 희고 뒷 배경은 까맣다. 알록달록한 것은 오른쪽에 놓인 꽃들. 빨강, 주황, 분홍. 반대편에는 택배 상자에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었다. 적막을 깨고 쾌활한 목소리로 남편 '경만'이 들어선다. 어느새 슈미의 눈은 감겨있다.


경만은 엄마와 통화하면서 밝게 웃고, 장난스럽게 대꾸하고, 애정 어린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슈미의 고요함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자신의 책들이 쌓인 상자를 정리한다. 경만이 돌아오자 슈미는 눈을 뜬 상태다. 행복에 겨운 경만과 달리 슈미는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 경만과 함께 살아갈 이 공간엔 자신을 위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슈미가 그토록 좋아하는 피아노가 왔으면 좀 달랐을까. 건조한 반응이 서운할 법도 한데 경만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슈미를 달랜다.


둘의 대화는 묘하게 겉돈다. 경만은 슈미에게 최대한 맞춰주며 좋은 분위기를 만드려 애쓴다. 냉담한 슈미가 너무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건 경만이 슈미가 진정 원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화기애애하고 사랑이 넘치는 건 그에게 전혀 중요치 않다. 슈미의 자유의지, 벗어나고 싶은 역할극, 그러나 외면하고 싶지 않은 책임감. 복잡한 모순을 표현하는 슈미인데 경만의 눈에는 그저 새 집에 적응 못한 나의 아내쯤으로 보이는 눈치다.


다소 답답한 상황을 깨트린 건 초인종 소리, 그리고 그들의 친구 '애경'의 등장. 런던에서 막 돌아왔다는 애경의 목소리는 밝고 쾌활하다. 경만과 똑 닮았다. 웃음도 많고. 둘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왔다지만, 얼마지 않아 본목적을 드러낸다. 런던에서 남편과 살고 있던 애경. 그들의 친구인 '유완'을 입주교사로 들였는데 그 유완이 문득 자취를 감췄다. 서울에 있다는 소식 하나로 유완의 또 다른 친구인 이들을 찾아온 것이다.


경만은 유완에게 연락할 편지를 쓸 겸 방으로 사라지고, 애경과 슈미는 둘이 남는다. 슈미는 진즉에 유완과 애경 사이에 그 이상이 있단 걸 눈치챈다. 경만과 있을 때엔 버석한 목석같던 그가 매끄러운 실크 옷을 휘날리며 애경을 설득한다. 유려한 몸놀림이 뱀을 연상한다. 애경과 자신의 친밀감을 강조하고자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곤 '슛미(shoot me)'라고 불렀던 과거를 언급했다. 슈미와 슛미, 한 끗 차이.


그의 직감이 맞았다. 애경은 런던에서 유완과 사랑에 빠졌다. 이미 연인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유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것이 아닌지라 런던에서의 생활은 외로웠고 그때 유완이 런던에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입주 교사로서 자신의 집에 들인 것이다. 알코올 중독이며 다소 망나니 같은 생활을 했던 유완이 그곳에선 작가로서 빛을 발했고, 애경은 그의 책에 삽화를 그려 넣어 그들의 작품을 완성했다. 애경에게 그건 단순한 협업이 아닌 둘이서 낳은 아이나 다름없었고.


편지를 완성한 경만. 애경이 이 집에서 볼 일은 끝났다. 유완의 우편함에 직접 넣겠다며 사라진 그. 다음 손님은 잘 갖춘 정장을 입고 나타난 '도규'. 장난스러움과 능글맞음, 그리고 이상하게 스산한 눈빛과 미소. 꺼림칙하다. 그도 그럴 게 검사인 도규는 자신의 부와 명예, 경만의 절친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슈미에게 접근했다. 은근한 협박과 유혹. 슈미는 그의 아슬아슬한 선 타기에 넘어가진 않아도 그가 건네는 것들을 부러 뿌리치진 않는다. 총이나 총알 같은 것.


이쯤 되니 하나씩 보이는 거다. 슈미는 친구들 각자와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 유완과는 무엇을 비밀로 만들었을까?


과거 유완과 깊은 관계였던 슈미. 경만과 대화할 때보다 훨씬 생동감 넘친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책을 출간하고 상당한 호평을 받은 유완. 술과 광기로 물든 이에겐 조용히 앉아 집중하는 게 일종의 일탈이라고, 애경이 그랬던가. 슈미는 유완에게서 희망을 본 것 같다.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 그가 인물들에게 한 번씩 혼잣말처럼 뱉은 말. 포도 잎사귀를 머리에 쓰고 아폴론처럼 아름답게.


술과 광기, 쾌락과 자유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포도 잎사귀)와 균형과 절제, 이성을 찬미하는 아폴론(태양).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신神들이지만, 둘은 형제이다. 아무리 달라도 뿌리는 같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모순처럼 보여도 슈미는 화합이 가능하다고 보았을 테다. 알코올 중독 치료 중인 유완의 광기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책을 탄생시켰으니.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모든 것을 책임진다'.

 

슈미가 그토록 바라던 삶을 이룰 수 있음을,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음을, 유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감춘 것을 드러내야 하고, 드러난 것은 감춰야 한다. 유완에게 애경이 생각하는 관계를 폭로하고, 유완은 분노하며 예전의 광기 어린 모습으로 돌아가 술을 입에 댔다. 애경은 절규하면서도 다른 네 명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춤을 추자 홀리듯 따라 추고, 다시 절규한다. 슈미는 자축하듯 신나게 웃으며 춤을 췄지만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서진 않는다. 밤 10시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렇게 아침을 맞이한다.


경만은 답지 않게 시무룩하다. 유완이 자신이 집필할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들려줬는데, 정말 대단했다고. 정교수 자리를 두고 경쟁자가 된 둘인데 경만은 자신감을 몽땅 잃은 듯했다. 자신이 아니라 유완이가 정교수 자리에 어울린다며. 약간의 질투심도 느꼈다고. 한없이 맑기만 한, 태양 같은 사람. 과도하게 균형 잡힌 그에게는 약간의 혼란이 필요하다. 때마침 그는 유완에게 돌려주지 못한 테이프를 가지고 왔다. 슈미는 다시 한번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그에게서 테이프를 받아낸다.


다음 손님은 유완이다. 퀭한 얼굴. 오래간만에 마신 술을 몸에서 해독하기 버거웠으리라. 게다가 그는 자신의 노고가 담긴 테이프를 잃어버린 줄 아는 상태다. 그 헛헛한 마음을 숨기고자 '버렸다'라고 표현하지만, 모든 것을 아는 슈미. 그런 거짓으로 동요될 리 없다. 그에게 건넨 건 총자루와 총알. 실의에 빠진 유완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사라진다.


홀로 거실에 남은 슈미. 유완의 집필 테이프를 모조리 뽑아낸다. 자신의 선택을 누구도 돌이킬 수 없도록. 유완이의 아이, 애경이의 아이, 나는 아이를 없앴다. 이때 슈미가 말하던 아이는 점차 'I'로 변화한 것 같았다. 나는 내 손으로, 유완이의 자아, 애경이의 자아, 그리고 나의 자아까지 없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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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유완을 제외하고 모인 네 사람. 도규는 유완이 스스로 쐈음을, 그러니까 슛미(shoot me) 했음을 알린다. 현재 중상 상태라고. 충격에 빠진 애경과 경만. 와중에 슈미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다. 유완이가 정말,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겨누었냐고. 보통 때라면 짚고 넘어갔을 테지만, 애경과 경만은 그럴 겨를 없다. 도규가 오기 전, 경만은 슈미가 유완의 테이프를 망가뜨렸단 걸 알게 되어 격노했다. 그건 유완이의 아이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일정 부분은 자신도 책임이 있다는 걸 느꼈을 테다. 슈미에게 자신의 비밀인 질투심을 드러냈으니까. 잠깐 들었던 감정이라고 해도 감추었던 걸 드러낸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책임지고 싶었을 거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애경에게 있었으니, 녹음테이프를 키워드로 정리한 노트였다. 경만은 밤중에 유완의 테이프를 듣고 오랫동안 얘기했다. 기억을 되살려 조각을 맞추면 집필 기록을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두 사람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하니까.


경만은 자신에게 들었던 낯설고 탁한 감정-질투심-에 대한 속죄를, 애경은 뒤틀린 관계를 원점으로 되돌릴 방법을 필요로 했다. 드러난 비밀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순간, 그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서재로 사라진 두 사람. 도규는 슈미에게만 숨겨진 사실을 전한다. 유완이는 이미 죽었다고. 애석하게도 슈미가 준 총알과 총기 관련 서류가 도규에게 있으므로 그의 죽음에 슈미가 연루될 여지는 충분하다.


도규는 이를 빌미로 슈미를 협박한다. 무릎을 구부려 앉은 슈미의 다리 아래로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으며. 속박하듯이. 슈미는 자유와 책임을 갈망했지, 이런 구속은 원했던 적이 없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책임을 위한 선택이 필요하다. 그렇게 슈미는 다시금 총을 든다. 어느새 조명은 파랗게 물들고, 암전. 총소리. 그가 갈망하던 책임과 자유는 삶에 존재하지 못했으므로, '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이 사라졌으므로, D(eath)를 선택할 수밖에.


어느 드라마 속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무언가를 영원히 가질 수 있는 방법은 그걸 잃는 거야.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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