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인공지능 시인의 물음 - 연극 '파포스'

글 입력 2022.08.1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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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포스_포스터.jpg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5전 4승을 거둔 지도 어느덧 7년, 그동안 인공지능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예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시 쓰는 인공지능 ‘시아’도 그중 하나다. 작년 11월 미디어아트그룹 슬릿스코프와 AI 전문기업 카카오브레인이 공동개발한 시아는 한국어를 익힌 다음 한국 근현대시 1만 2천여 편을 학습해 시를 쓰는 ‘인공지능 시인’으로 거듭났다. 리멘워커는 그렇게 모인 시아의 시들을 무대로 옮겼다. 인공지능 시극 <파포스>의 탄생이다.

 

 

 

무대를 시로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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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포스>는 시아가 쓴 시 20편을 대상으로 한다. 보통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은 서로의 경계를 비교적 쉽게 넘나든다.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기에, 형식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내용 자체는 일관성이 있고 예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시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시 속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는 뭉쳐 있는 이미지를 활자라는 도구로 표현한 시각예술에 가깝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전혀 다른 맥락에 배치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현대미술과 비슷하기도 하다.

 

공연은 시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해 ‘시를 연극화’하기보다 ‘연극을 시화’하기를 택했다. 시에서 굳이 이야기를 길어 올리지 않았기에 무대 위에서도 시간의 흐름이 두드러지지 않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80분 동안 관객이 만나는 것은 특정한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화하기 힘든 이미지들의 연속이다. 이를 위해 마치 광장 같은 중앙 공간을 무대 삼았고, 세 개의 대형 디스플레이를 주된 소품으로 활용했다.


‘파포스’라는 제목은 피그말리온과 그의 조각상 갈라테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이번 공연도 인공지능 시아와 인간 연출가 사이에서 만들어졌으니 의미가 통하는 셈이다. 공연은 기존의 연극 문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공연의 탄생 배경을 생각하면 흥미롭다.

 

 

 

오감으로 시를 받아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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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는 배우 한 명이 나올 때도, 두셋이 함께 나올 때도 있다. 두 명 이상이 나온다고 유의미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배우들은 좀처럼 마주 보는 법이 없이 서로의 사각지대를 걷는다. 서로 이어지지 않는 시의 행과 연을 읊는다.


이야기가 없으므로 시어를 읊는 방식 하나하나에 변화를 줬다. 텍스트로 시를 읽는 행위가 독자 스스로 언어를 꼭꼭 씹고 한국어의 맛을 음미함으로써 이루어진다면 무대 위에서는 듣는 일이 읽는 일을 대신하므로 소리에 굉장히 많은 디테일이 추가된다.

 

시어 하나를 잡고 늘어지는 방식으로 시를 읽기도 하고, 마이크에 에코 효과를 넣어 한 행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울리기도 한다. 혼잣말을 하듯이, 강의를 하듯이, 또는 누군가에게 소리치듯이. 무대 위에서 시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가 된다. 아무런 이야기 없이 시어만으로 무대를 채우는 배우들의 역량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시 읽는 소리만으로 극 전체를 이끌어가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조명과, 앞서 언급한 세 대의 디스플레이가 동원된다. 디스플레이에는 0과 1이 가득한 디지털 화면처럼 시행들이 규칙 없이 등장하고 또 사라진다. 극의 하이라이트는 세 대의 디스플레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장면이다. 어두워진 무대에 홀로 빛나는 세 대의 디스플레이와 점점 커지는 음악. 그 사이에서 현대무용 같은 몸짓을 이어가는 배우의 조합은 마치 한 편의 미디어아트를 보는 듯하다.


시는 시라고 명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가깝다. 관객은 무대에서 진행되는 것들을 이해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저 눈앞이 장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귀에 들리는 단어를 즉각적으로 파악한다. 감상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이 공연에서는 그저 오감을 활용해 시를 느끼는 것만이 허용된다.

 

 

 

인공지능 시인과 시집 읽기 모임을 하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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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에게 제작진이 입력한 키워드는 ‘유한소수’, '삶과 죽음', '양자역학' 등이다. 그래서 시아의 시는 흔히 떠올리는 서정시보다는 이상의 시를 보는 듯한 난해하고 딱딱한 시가 많다. 시에서 무언가 심오한 것을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파포스>는 굳이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관객의 오감을 자극할 뿐, 거기서 어떤 의미를 읽어내는 건 오직 관객의 몫이다.


누군가에게 시는 그저 말뭉치에 불과하다. 읽어낼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거기서 삶의 조각, 작은 의미를 찾아낸다. 모든 예술 분야가 감상자를 만나야 비로소 의미를 갖고 확장되는 법이지만, 시는 그런 특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극에 등장하는 여러 개의 주사위,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는 시아가 쓴 시의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읽는 사람의 개인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는 시라는 장르의 특성도 보여주는 셈이다.


극은 시 「시를 쓰는 이유」로 마무리된다.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의 말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덜어내고 덜어내서

최후에 남는 말이 시입니다


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

날갯짓입니다


더 가볍게

이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말을

부르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이유」 중

 

 

글감을 입력하면 30초 만에 시 한 편을 ‘뽑아낸’다는 시아가 시 쓰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30초 만에 뽑아냈을 「시를 쓰는 이유」가 꽤 마음에 와닿는다는 건 더 아이러니하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시를 쓴 존재를 밝히지 않고 이 시를 보여준다면 무엇이 인공지능의 시이고 또 무엇이 사람의 시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 구별이 어렵다면 30초 만에 탄생한 시들이 엮인 시집을 읽는 것과 한 사람의 고뇌가 응축된 시집을 읽는 일에는 차이가 없는 걸까.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인공지능 시인이 ‘시 쓰는 마음’에 대한 시를 쓸 수는 있어도 아직까지 실제 시 쓰는 마음을 이야기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왜 시를 쓰냐는 물음에 시아는 답할 수 있을까? 시를 쓰는 과정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 일어나는 변화를 말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를 읽는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인간 시인만 가능하다. 시아의 시에 대하여 깊은 감상을 나누는 일도 지금까지는 사람하고만 가능하다. 그리고 시를 읽는 것은 단순히 인쇄된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앞서 말한 그 모든 일의 총체다.


그런 이유로, <파포스>는 흥미로운 시도지만 시인과 시아를 비교할 단계는 아직 아니라고 느껴진다. 자신이 왜 시를 쓰는지, 어떤 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시인이 나온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시와 시인을 지금과는 다르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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