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직선 위 점 하나, 온수공간

글 입력 2022.07.0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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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역과 홍대입구역 사이, 온수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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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역과 홍대입구역 사이 서교동 일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목적지보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 지나는 길로 여겨진다.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직장인들로 북적이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고요한 골목에는 줄 서는 맛집이나 힙한 카페 대신 작은 사무실이 위치한 낮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별거 없어 보이는 이 골목길에 뜻밖의 공간이 숨어 있다. 회색 건물들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하얀색 입간판을 찾으면 된다. 입간판을 보고 자갈을 밟으며 안쪽으로 들어가면 현실과 분리된 듯한 공간이 반긴다. 주변을 관찰하며 걷는 이들을 위한 선물 같은 장소, '온수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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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소개에 따르면 온수공간은 외부 지원 없이 두 사람이 운영 중인 '근린생활공간'으로, "시각/다원예술, 도시/건축, 교육 및 강연, 출판, 디자인, 지역사회 연계 프로그램 등 순수예술과 그 외연의 지점에서 보다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수용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오래전에 지어진 주택의 외관과 구조를 보존하고 있는 온수공간은 여느 갤러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 구분된 여러 개의 작은 공간이 보인다.

 

가끔 전시를 보러 오는 사람 한두 명 외에는 방문객이 많지 않고, 스태프 공간도 구석에 숨어 있기 때문에 전시 자체와 공간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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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온수공간에서는 두 개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1층에서는 김민지 작가의 개인전 <우연적인 환상>을, 2층과 3층에서 조원 작가의 개인전 'MoonBow: 밤에 뜨는 무지개'를 볼 수 있다.

 

 

 

우연적인 환상



김민지 작가의 전시를 돌아보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공백이다. 모든 것이 촘촘하게 짜여 있는 복잡하고 지저분한 길거리에서 전시공간으로 들어오자 텅 빈 공간감에 정신이 멍해졌다.

 

공백의 출처는 <무제>(2022)와 <우연적인 환상 속 풍경>(2022)을 포함해 전시의 많은 부분에 사용된 트레싱지였다. 반투명한 데다가 바스락거리는 질감을 가진 트레싱지를 계속 보고 있으면 트레싱지 이면에 있는 불명확한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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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땅 위의 조각>, 혼합재료, 가변설치, 2022

 

 

<기울어진 땅 위의 조각>(2022)이 비치되어 있는 쪽으로 가면 테이블 위에 미처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는 전시를 위해 함께 준비한 동명의 SF시집 샘플이 놓여 있다. 뒤편 작은 테이블에는 흙이 쌓여 있고, 그 속에 자음과 모음들이 묻혀 있다. 흙 속에 묻힌 자모음은 실제 시 속에서 단어의 본래 의미가 해체되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쭉 이어진 산문과 달리 시를 읽을 때는 단어와 단어 사이, 연과 연 사이 공백을 느끼고 음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공백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를 보는 것은 마치 시를 읽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전시 공간 곳곳에 이 시집에서 발췌한 문장과 단어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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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적인 환상 속 풍경>, 종이 위 uv인쇄, 검정색지, 가변설치, 2022

 

 

영상작업인 <새로운 빙하기에 대하여>(2021)에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이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담겨 있다.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자 물이 복사뼈까지 차오르고 지구의 자전 속도가 변한다. 마침내 오늘과 내일,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세상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몽환적인 장면이 지나가고 매일 매일 쌓이는 재난문자로 마무리되는 영상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우연적인 환상'이라는 전시 제목을 가장 잘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안쪽 방에 있는 <늘어뜨려진 하루>(2022)이다. 방에 들어가면 어두운 조명 아래 정적인 음악이 들려온다.

 

관람객이 봐야 하는 대상을 명확히 제시해주는 일반적인 전시와 달리, 김민지 작가의 <우연적인 환상>은 명확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는 과정 속에서 산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관람객 개인의 목소리를 듣는 데 의의를 둔다.

 

 

 

MoonBow: 밤에 뜨는 무지개


 

조원 작가의 'MoonBow: 밤에 뜨는 무지개' 역시 공백이 두드러지는 전시다. 김민지 작가의 전시에서 느껴지는 공백이 관람자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면, 조원 작가의 전시 속 공백은 소음이 가려주던 위화감과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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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럼틀2>, 아크릴판에 염색, 용수철_가변설치_2022

 

 

어떤 사물이 놀이 기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가 어우러져야 한다. 다양한 부품들이 모여 놀이가 가능한 구조를 이루고, 놀잇감으로 보이기 위한 시각적인 요소도 필요하며, 무엇보다 그걸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지옥탈출> 시리즈(2022)와 <미끄럼틀> 시리즈(2022)는 우리에게 익숙한 놀이 기구를 분해하고 그중 한 요소만을 강조해 제시한다. 용수철과 경사면만 덩그러니 놓인 작품들은 균형을 이루던 사물에 공백이 생겼을 때 어떤 위화감을 느낄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정글짐>(2022)과 <혼자 앉을 수 없는 의자>(2022)도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흔히 보는 사물의 낯선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정글짐이지만 유리와 거울을 매단 채 누구도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은 구조물과 의자이지만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구조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을 그 사물이게끔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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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앉을 수 없는 의자>, 자작나무 등, 신주_가변크기_2022

 

 

영상작업 <공허한 놀이터>(2021)에는 흰 옷을 입은 여자가 건물 옥상에서 혼자 여러 가지 놀잇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담았다.

 

백색소음이 들려오는 도시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삭막한 곳으로 그려진다. 표정의 변화 없이 널빤지를 오르고 흔들리는 구조물에 몸을 맡기는 여자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면 놀이라는 행위 자체가 어색하고 낯설어진다.

 

전시 공간을 천천히 돌다 보면 전시 제목인 '달무지개'처럼, 평상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사물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물은 멈춰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니, 그 순간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다.

 

*

 

전시를 다 보고 다시 골목길로 나오면 잠깐 다른 세상에 있다 온 것 같다.

 

그저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지나쳐 가던 길도 새로워 보인다. 합정역과 홍대입구역 사이를 지나갈 일이 있다면 골목으로 들어가, 직선 위의 점 하나 같은 온수공간에 들러보자. 전시 소식과 일정은 인스타그램과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번에는 새로운 전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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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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