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해답의 폭력, 그리고 가스라이팅 [영화]

영화 <곡성(THE WAILING, 2016)>이 던지는 메세지
글 입력 2021.10.2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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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미리보기.jpg

 

 

 

무지의 공포와 해답의 폭력


 

사람의 악독함 중에서도 가장 저지르기 손쉬운 악독함은 사랑을 지어내는 것이다. 특별히 일부러 상대의 결핍을 노려 지어낸다면 훨씬 질이 악해진다. 없어서 갈구하는 이들에게, 이루고자 염원하는 이들에게 기대는 확신처럼 건네진다. 그것을 이용하여 위장한 답을 주려는 사람들, 기형적 믿음을 설파하는 사람들의 악질적 폭력은 요즈음처럼 혼란한 시대에 더욱 판을 친다.


가만히 살피면 속이는 자들은 언제나 속는 사람의 착취자가 되어 있다. 피해자가 믿어야 할 것은 정해져 강요된다. 세상은 그렇게 명쾌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사실은 세상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해답이 없을 것 같은 무지의 공포 속에서, 이것만이 해답이니 믿으라고 강조하는 이들만이 차고 넘칠 뿐이다. “뭣이 중한 지도 모르면서.”


이러한 ‘해답의 폭력’을 꼬집는 영화가 바로 나홍진 감독의 <곡성(THE WAILING, 2016)>이다. <곡성>의 내러티브는, 딸을 잃을지 모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종구의 처절한 해답 찾기의 과정이다. 종구는 확신과 안심을 위해 정확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사건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찾기 위한 노력은 물론 수포로 돌아간다. 편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교차하고, 종구가 이뤄낼 수 있는 것은 끝내 아무 것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함 뿐이다. 감독이 종구를 괴롭히려 했다기 보단, 각자 자기의 것이 해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총체적으로 만들어내는 혼란을 스크린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의심과 주요인물들의 현혹. 그것들이 엉켜 직조해낸 혼란의 서사가, 세상의 해답의 폭력에 일침 한다.

 

 

본문 곡성.jpg

 

 

 

억지로 기워붙인 사랑, 가스라이팅


 

주는 것은 주는 것이란 이유로 관대히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주는 것은 관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이자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나 잘 주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타인과 주고 받음에 있어 기본은 불통임을 우리는 상당 순간 잊는다. 기의(記意, signified, 어떤 기호가 지시하는 실제 대상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실체)는 늘 유동하며, 우리가 온전히 주고받는 것이란 텅 빈 기표(記標, significant,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로써 의미를 전달하는 외적인 형식)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거나 잊은 사람들, 혹은 잊고 싶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기표가 세상 공통의 기호로 쓰이길 꿈꾼다. 자신이 꾸민 무언가를 주기만 하며 사랑하고 있다고 우기는 것이 억지로 잘라 기워 붙인 사랑이다. 그것의 표상은 아마도 가스라이팅이다.

 

 

[이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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