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집, 나의 삶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9.1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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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회현동 기념비>

2005, 종이에 채색, 259×194cm

 

 

<회현동 기념비>는 2005년, 주로 오래된 아파트를 그리는 작가 정재호가 회현시범아파트를 그린 작품이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세월의 흔적으로 이곳저곳 갈라지고, 얼룩진 아파트이다. 감옥 같기도 한 창문 속에는 간간이 빨래가 널려 있는 집이 보인다.

 

또 얼핏 카메라같이 생긴 실외기는 집마다 다른 위치에 설치되어 있다. 그 외에 살림살이가 훤히 드러난 집, 반면 각기 다른 색상의 커튼에 가려진 집 등 획일화된 구조 안에서도 각 집의 특징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작품 아래,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공간에는 화분과 장독대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마당 혹은 옥상이 있는 주택을 연상시킨다.

 

외벽의 새카만 얼룩은 마치 비가 내리는 듯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다. 정재호는 세필로 건물의 나이테를 세밀하게 표현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깔끔하고 미화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재호의 붓끝에는 현실을 미화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대상의 얼룩 하나까지 그리는 데에 집착한다. 그 결과 작가의 그림은 종이에 건물을 찍어내기라도 한 듯 사실적이다. 각 집의 내부까지 집요하게 그려낸 것을 보니 마치 작가가 ‘네 눈에는 이 건물이 그저 낡고 으스스해 보이겠지만, 여기에도 누군가의 삶이 존재한단다’라고 말을 건네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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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천변(川邊)호텔-삼일아파트>

2005, 종이에 목탄, 먹, 채색, 194×259cm

 

 

대상을 사실적으로 담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아마 회화보다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더욱 어울릴 것이다.

 

그럼에도 정재호가 회화를, 그중에서도 동양화를 기록의 수단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인 한지는 다른 종이에 비해 물감을 머금는 속성이 강하다.

 

작가는 붓에 삶을 묻혀 더는 종이가 머금을 것이 없을 때까지 덧칠한다. 그의 붓질 한 번에 아파트가 용케 지키고 있었던 누군가의 추억이 한지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이렇게 정재호는 대상의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종이에 옮겨 담으며, 아파트의 외양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삶을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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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시민아파트 전경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로 낡은 이 아파트도 과거에는 누군가의 ‘집’이었을 터다.

 

그러나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오래된 건물들은 누군가의 추억을 담은 공간이 아닌 그저 흉물로 자리하게 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필연적으로 파괴되거나 새로운 옷을 입기를 요구받는다.

 

우리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멀끔하고, 화려한 풍경의 도시가 내 삶이었던 것의 희생으로 태어났다는 점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정재호만은 고이 품고 있었던 그 과거를 삶이라는 이름으로 재생한다.

 

그가 담아낸 아파트의 열린 창문 안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빨래가 널려 있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에는 김장철 입주민들이 함께 모여 담갔을 김치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참고문헌

강수미, 정재호 작품론, norwegian wood, igloos, 2004.07.27.

김한들, “오래된 건물과 시대의 기록은 사회상의 바탕”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세계일보, 2020.08.17.

심소미, 열섬_Heat Island, 네오룩, 2017.06.16.

유지우, 집, 그 닿을 수 없는 꿈, 인디포스트, 네이버 포스트, 20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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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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