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예술로 산책] #2. 동네에 숨겨진 취향 가득 사사로운 공간, 하얀정원과 사생활카페

무욕의 상태로 걷다 만난 책, 그림, 음악 그리고 술
글 입력 2021.08.1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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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알람이 쉴 새 없이 울린다.

 

이번엔 1000명이란다. 확진자 수 네 자리를 찍더니 벌써 한 달째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7월의 모든 약속을 8월로 미뤘건만, 이제 정말 모든 약속들이 잠정 연기되었다. 그렇게 다시 나 홀로 슬기로운 집콕 생활이 시작됐다.

 

호기롭게 '슬기로운' 일상을 다짐했지만 쉽지 않았다. 더위보다 더 큰 문제는 반복되는 일상 속 무력감, 우울감 그리고 이유 없는 지침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욕의 상태에 이르렀다. 감각도 무뎌졌다.

 

일주일을 그렇게 그냥 흘려보냈다. 무의 상태에서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 깊숙이 한구석에서 뜨듯미지근한 꿈틀거림이 솟아났다. '아무렴 집에만 있을 수는 없지.' 이 지긋지긋한 무기력을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최후의 발악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산책은 무기력과 역동성 그 사이에서 시작한다. 집 밖은 너무 위험하지만, 더 이상은 침잠될 수 없어 아주 가볍게 동네 한 바퀴를 걸어보기로 한다.

 

*

 

Episode #2. 동네 한 바퀴

 

나에게 '동네 한 바퀴'란 집으로부터 최대 10분 안으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반경을 의미한다. 10분이면 생각보다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근처 동네 시장에 가서 아이스크림과 과자와 같은 요깃거리를 살 수 있으며, 가장 가까운 역을 찍고 돌아올 수도 있다. 그 와중에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발걸음보다 시선과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 다니고 머물러보기로 했다.

 

나도 어디에서 발걸음이 멈출지, 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가는 대로 가보는 것이다.

 

 

예술 조각 01 이야기가 흐르는 기묘한 책방


동네 시장을 향할 때면 매번 지나치던 곳이 있었다. 이름은 '하얀정원'. 정확히 어떤 목적의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궁금했다. 매번 미루고 미루다 오늘은 왠지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친절하게도 건물 앞에 있는 실외 간판이 이곳은 어떤 공간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다만 내가 눈길을 주지 않아서 몰랐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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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정원은 인문예술 출판사 '아름다움'의 오프라인 쇼룸이다. 독립출판 책과 특히 시각예술 서적(전시 도록, 미술과 미학 관련 철학 책)들을 주로 다룬다. 그 외에 청년작가 작업을 소개하는 갤러리이자 문화 강의를 기획하는 연구소이기도 하며, 상담 선생님이 계셔서 힐링할 수 있는 아지트의 역할도 한다고. 가장 신기했던 것은 이곳에서 타로·점성술 심리 상담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더 찾아보니, '하얀정원'이라는 이름은 '예술과 책이 있는 공간에서 영감을 받아 갈 수 있는 아늑한 정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지었다고 한다.

 

'2시 오픈'이라고 적혀있었지만 건물 내부에는 사람이 있었다. 용기를 내어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나보다 먼저 문을 당겼다. 그 사람은 들어가자마자 자리에 앉더니 너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알고 보니 타로를 배우러 오신 분이었다. 타로 카드에 대한 정의부터 카드를 보는 방법까지 둘 사이에서 사뭇 진지한 이야기가 오갔다.

 

"카드에는 무엇을 말하려는지가 그대로 드러나요.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을 직관적으로 설명하면 돼요. (...)"

 

당연한 말인데 상담사분의 차분하면서도 힘 있고 술술 흐르는듯한 자연스러운 화법에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빠져들었다. 아,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내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많이 좁았다. 중앙에는 큰 탁자가 놓여있었는데 그 사이로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간격이었으니 마음 놓고 편하게 둘러보기는 어려웠다. 이 점이 참 아쉬웠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LP 판, 그림, 책이었다. LP 판은 들어오자마자 왼편에 쌓여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사용하진 않는 듯 보였다. 대신 다른 스피커에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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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책의 종류는 경계 없이 다양했다. 적나라하고 과감한 드로잉을 포함하여 고양이· 두꺼비· 새 그림, 강렬한 눈빛과 색채가 인상적인 인물 그림, 그리고 편안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잔잔한 풍경 그림도 있었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전통 설화 이야기가 실린 책부터 시작해서 인문· 철학· 예술 분야의 책들이 많았다.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 있는 듯 보였으나 좁은 공간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놓여있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그러다 우연히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스몰 토크: 뉴욕에서의 대화> (맹지영, 유J 지음). 두 저자는 각각 a와 b가 되어 뉴욕에서 마주한 예술의 순간에 대해 스몰 토크의 형식으로 주고받는다. 특히, 책에서 '열한 번째 대화 - 무거운 문, 가벼운 문'의 도입부는 참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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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다른 것 같아.

뭐라고?

a 문 말이야 문. 열고 닫는 문.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 <스몰 토크: 뉴욕에서의 대화> (맹지영, 유J 지음) 中

 

 

정말 뜬금없이 질문을 던져보는 것. 잠깐 들여다본 a와 b의 대화를 통해, 예술이라는 것도 적극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비로소 생생히 살아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일상 속 사소한 예술에 관한 대화를 담아냈다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각각 a와 b가 되어 반씩 구분 지어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형식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 나도 곳곳에 스며든 사사로운 예술 조각을 발견할 줄 아는 안목이 생겼을 때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동료와 함께 스몰토크를 나누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담아내고 싶은 바람도 생겼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 책을 구매하였다. 수익은 이웃 돕기 성금에 사용된다고 하니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의미 있는 선물로 다가왔다.

 

책을 사고 나니 다시 타로 이야기가 들렸다. 아까보다 더 경쾌한 재즈 음악이 깔렸다. 말과 글, 그림, 음악 등 동시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흐르고 있었다. 오래 머무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여러모로 참 기묘했다.

 

*

 

하얀정원을 나와 다시 시장길을 통해 걸었다. 시장은 동네 산책길 중 꼭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만큼 활기를 띠지 않지만 여전히 맛있는 반찬, 간식, 식재료들을 보면 눈이 즐겁기도 하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묘한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터벅터벅.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시장 길 끝까지 다다랐다. 그곳에는 익숙한 한 카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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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사생활 카페',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한 당신을 위한 공간이다. 이곳은 낮에는 카페를, 밤에는 바(bar)를 운영하는 곳으로 어쩌다 가끔 특별한 술맛이 생각나면 들르던 곳이었다. 이제껏 코로나로 인해 일부러 카페 다니기를 멀리하다 오늘은 나온 김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입구에 이어 지하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전통적인 소품들이 놓여있었다. 동양화가 멋들어지게 걸려있고, 전통문양이 새겨진 전등이 빛을 내고 있었다. 소품을 따라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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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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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른 사생활 카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한눈에 담긴 색은 갈색, 흰색, 초록색이었다. 갈색의 가구들, 흰색 벽, 초록빛 조화까지. 한데 모였을 때 조화로움과 안정감을 느끼는 색들이다. 운이 좋게도 사람은 없었다.

  

주인장의 사사로운 취향이 깃들어있는 이곳에는 책과 잡지, 그리고 음악이 있다. 여기에 전통적인 인테리어와 서양의 술까지 더해져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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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술이 빠질 수 없다. '김렛'. 진 베이스에 라임 주스와 시럽을 더한 칵테일이다. 처음에 주문할 때 단맛을 싫어한다 했더니, 사장님께서 친히 라임 주스와 시럽을 빼고 대신 생 라임을 짜 넣어주셨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힘든 하루의 상쾌함을 전해 주는 처방 칵테일'이라고 설명하는데 정말 딱 그 맛이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밤 잘 어울릴만한 술이다.

 

술을 마시며 공간을 조금 더 찬찬히 둘러보았다. 내가 앉아있는 이곳 바로 앞에는 종이 조각들이 붙어있었다. 그냥 일반 종이가 아니다.

 

 

예술 조각 02 영수증에 기억을 드로잉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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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이었다. 그것도 독일 영수증. Quittung(영수증), REWE(독일 마켓 이름) 등 친숙한 단어가 보여 괜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영수증 위에 남겨둔 타임라인을 보면 모두 2016년 또는 2017년의 기록이었다. 노르스름한 영수증에 테이프로 겨우 이어붙여 힘없이 나팔거리는 모습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영수증 드로잉은 베를린에 두 달간 머물며 시작됐습니다. 저렴한 생필품 물가에 감동하여 그 기록이 담긴 영수증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본 것이 영수증 드로잉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영수증은 그날 어디에 갔고 무엇을 소비했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며칠만 지나도 수북이 쌓이는 영수증에 담긴 내용은 내가 사는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 위에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상에서 또는 여행지에서의 삶과 감정, 생각을 담는 저만의 일기가 되고, 지금을 사는 평범한 젊은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 Jemma & the city 본문 中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본 그림은 푸른빛을 내었다. 대개 푸른색 펜으로 작업을 했고 가끔 연필로 무심하게 툭툭 그려내기도 했다. 필요한 경우 포인트가 되는 부분에 다른 색깔로 색칠하기도 했다.

 

 

베를린은 한눈에 반할만한 화려한 도시라기보다는 알수록 매력 있고 환경과 생명 중심, 즉, Green이라는 단어를 깊이 떠올리게 하는, 그리고 지난날을 반성할 줄 아는 도시였습니다. 그 안에서의 나의 삶과 감정, 생각들을 초록빛으로 담아 본 것이 바로 Jemma in Green Berlin입니다.

 

- Jemma in Green Berlin 본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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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해 만난 Jemma의 베를린에서의 기록은 다채로운 모습을 띄었다. 한 여성이 새들에 둘러싸여 편안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고, 브란덴부르크의 문 앞에 놓인 자전거에는 희망의 끈들이 매달려 있으며, 턱을 괴고 고심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밖에도 침대에 편안히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모습, 맥도날드에서 메뉴를 주문하고 턱을 괴고 기다리는 모습, 사람들이 즐겁게 춤을 추는 모습, 한적한 공원 속 편안히 드러누워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확실히 디테일하면서도 각 인물과 건물의 특징을 명확히 드러내는 드로잉이었다.


군데군데 그날의 단상들을 기록해 둔 흔적들이 보인다. 그러나 영수증 뒷면에 새겨진 글귀와 겹쳐 보이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 살짝 번지고 흐릿해져 정확히 무엇을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Jemma만 알고 있을 테지. 애초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을 테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다만 Jemma에게 영수증은 공짜 일기장이자 그림판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서는 그것 자체로 유일무이한 기록이 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예술 조각 03 밑동 없는 버섯 머리 전등

 

누군가 툭툭 건드렸다. 엄마였다.

 

"어우 놀랐잖아."

 

아까 '심심하면 들르던지'하는 나의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끝났다 싶었는데 엄마가 찾아왔다.

 

"저거 예쁘지 않아?"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가리키는 엄마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모양도 크기도 다른 라탄 등 3개가 보였다.

 

"응, 아까 봤어. 예쁘더라. 요즘 저런 전등에 꽂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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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은 마치 밑동 없는 버섯 머리 모양과도 같았다. 살짝 기울어진 형태에 가까이서 보면 엄청 촘촘한 조직에 어느 정도 깊이감도 느껴졌다. 깊게 팬 홈 덕분인지 라탄 등 안에 감춰진 전구의 주황빛이 바로 아래 놓인 식탁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카페의 전통적인 인테리어와 어울리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참 멋지다. 조명에 어떤 형태의 전등을 만드는지에 따라 빛의 강도나 방향, 그리고 그것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달라지니 말이다. 이런 멋진 조명을 보면 자연스럽게 소유 욕구가 생긴다.

 

"엄마, 나중에 집 생기면 저런 전등 하나 꼭 장만하려고."

 

"그러던가."

 

그 말을 끝으로 한 시간을 더 머물렀다. 하얀정원에서 산 책을 들여다보며 김렛 한 모금. 목이 뻐근하다 싶을 때 Jemma그림을 보며 다시 김렛 한 모금. 좋아하는 음악이 나올 땐 리듬에 맞춰 내적 춤도 춰보며 또 김렛 한 모금. 그렇게 몇 모금을 천천히 머금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저녁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사람들이 몰려왔고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나가야겠다 싶었다.


*

 

더 보기) 산책자의 시크릿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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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의 상태로 시작한 산책이었다. 도중에 마음에 드는 책을 구매했고, 예쁜 잔과 전등이 눈에 들어왔고, 누군가의 영수증 드로잉으로 어디서든 그림을 그려보면 좋겠다는 용기도 얻었다. 주인장들의 사사로운 취향이 가득한 공간을 거쳐 돌아온 나의 마음 속에는 다양한 욕구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소유욕, 꿈, 상상력 등.
 


당신은 오늘 어떤 예술 조각을 마주했나요?

 

 



 

《어쩌다, 예술로 산책》는 매달 격주로 기고되는 예술 에세이입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좋았던 일상 속 예술 조각 또는 흔적을 보고, 느끼고, 열렬히 사색한 것들을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합니다.

 

**감상 포인트: 계획된 산책로는 없습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습니다. 그저 뚜벅뚜벅 걷다가 어쩌다, 우연히 발견한 예술의 조각을 눈으로 담아 이야기합니다.

 

 

아트인사이트 신송희 컬쳐리스트.jpg



 

[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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