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이 도령과 로미오 [문화 전반]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왕자와 장군을 연기했던 여성국극 배우들
글 입력 2021.06.10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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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끌레르 젠더프리 시리즈>는 여성 배우들이 남성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신선한 기획으로 인기를 끌었다. 왕이나 CEO, 조폭 등 주로 남성들이 연기하던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새롭고,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남성성’을 전복한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인 1950년에도 왕자, 장군, 영웅을 연기한 여성들이 있었다. 바로 195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 배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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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된 소녀들> 자료화면, <별하나>(1958) 김경수와 김진진

 

 

여성국극은 음악극의 한 장르로, 모든 배역을 여성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이 특징이다.

 

1948년 결성된 여성국악동호회의 <옥중화>가 최초의 여성국극이며, 이후 대표적인 여성국극 배우로 자리 잡은 임춘앵이 이 도령 역을 맡았다. 여성국극이 탄생한 시기는 해방 직후, 국악계가 서양음악에 대응하여 활로를 모색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국악원’이 창설되었고,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창극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소리 위주로 진행되는 창극과 달리 볼거리와 연극성을 중요시한 여성국극은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고, 기존의 남성 중심 국악계에서 새롭게 부상한 장르였다.

 

남자 역을 연기한 남장 배우들의 존재감은 여성국극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201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은 5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 배우와 팬의 목소리로 그 뜨거웠던 인기를 증언한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조금앵, 이옥천 배우 등 남장 배우들은 여성팬에게 러브레터는 물론 혈서까지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팬의 부탁으로 가상 결혼식을 올린 적도 있다고 말한다.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로미오와 이몽룡, 장군과 왕자 캐릭터는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무대 위의 낭만적인 사랑은 삭막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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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된 소녀들> 자료화면, 임춘앵과 제자들

 

 

팬들의 뜨거운 환호만큼 배우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남장 배우들은 걸음걸이, 손동작, 목소리와 말투를 직접 연구하며 몸으로 익혔다. 무대에 오르기 전 분장도 직접 했다. 국극을 해서 번 돈은 대학 등록금이나 결혼 지참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옷을 사거나 영화를 보는 데 썼고, 팬들이 준 돈을 생활비로 쓰기도 했다.

 

모든 배우가 밥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는 연극의 특징 때문에 영화를 찍으러 갔다가 다시 국극 판으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국극보존회 총무였던 김복강 씨는 국극을 하러 모인 이들은 “집 떠나가지고. 남의 집 딸인지도 잊어버리고 시집갈 때인지도 잊어버리고 대학 가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생활했다고 말한다.

 

“국극단에서 돈을 가마니로 긁어 모았다”, “그거 한번 보려고 줄을 몇 미터까지 섰어”, “요새 뭐 오빠부대 그런 건 댈 게 아니야. 전부 혈서야”.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입을 모아서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약 10년 동안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은 60년대 말부터 점차 쇠퇴하게 된다.

 

관객들을 매료시켰던 여성국극의 명맥이 왜 끊어지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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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된 소녀들> 자료화면, <시집 안 가요>(1956) 조금앵과 박미숙

 

 

1950년대 후반, 한국 영화와 라디오 연속극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여성국극은 영상과 국극을 함께 보여주는 이중 연쇄극 등 새로운 시도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었고,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겪은 배우들은 스타였던 주연 배우들이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가정과 생계 문제로 극단을 떠나는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김진진과 김경수의 여성국극단 진경은 50년대 후반까지도 흥행했지만, 60년대 초반 배우들의 결혼 이후 쇠퇴하게 된다.

 

최근에는 여성국극의 쇠퇴 과정을 1950년대 ‘전통’ 담론과 가부장적 질서, 극단 내부의 성별 분업과 연관하여 해석하는 연구가 이뤄지기도 했다(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의 단체활동과 쇠퇴과정에 대한 연구」). 1950년대 말, 정권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통’을 활용했으며 서구문화의 유입, 여성 지위 상승 등의 사회적 변화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근간한 전통회복론을 불러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여성국극은 창극으로 대표되는 전통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전통의 아류, 질 낮은 통속문화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이후 타 문화예술단체들은 전통보호를 명목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지만, 여성국극은 국가적 지원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기 형성된 여성국극이 창극에 비해 ‘전통성’이 약하다는 인식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왕자가 된 소녀들>에서 김혜리 배우는 “(극단 진경에서) 당시 최일류 악사들이 반주를 했고, 연출과 안무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걸 다들 숨긴다. 여성국극으로 돈을 벌었던 연출가들이 여성국극 했다는 얘기를 안 한다”고 말한다. 이 또한 60년대 이후 언론과 남성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성국극은 기형적이고 질 낮은 통속문화’라는 인식의 영향이다.

 

이처럼 여성국극의 쇠퇴에는 기혼여성의 직업 활동에 대한 어려움, 국극단체 내부의 후배 양성 체계의 부재, 새로운 대중문화의 등장,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전통회복론 등 여러 층위의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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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랙킹콘테스트 [DRAGx여성국극] 포스터

 

 

비록 과거만큼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2000년대까지도 무대에 서며 여성국극 공연에 참여한 배우들도 있다. 무대와 관객을 향한 열정은 여전하다. 또한 최근에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여성국극이 갖는 의미가 주목받고 있다.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서이레 작가의 웹툰 <정년이>가 인기를 끌었고, 제3회 드랙킹 콘테스트에서 선보인 [DRAGx여성국극]은 여성국극이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의 시선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70년 전에 이미 젠더프리 공연이 있었고, 그 배경이 된 여성 공동체가 있었다는 점, 그 공연에 대중이 열광했다는 점만으로도 여성국극이 갖는 의미는 크다.

 

 

참고 자료

권은영, 「1950년대 여성국극의 대중극으로서의 가치」,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19(3), 2018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의 단체활동과 쇠퇴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여성학 27(2), 2011

정수진, 「여성국극은 어찌 무형문화재에서 배제되었는가?」, 실천민속학연구 33(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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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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