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는 질문, Cui bono? [문화 전반]

수잔 리이 스타 <양파알러지에 대하여>
글 입력 2021.06.0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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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은 비인간 행위자들에 주목하길 요청한다. 사회적으로 네트워크가 조직되고, 변화하고, 유지되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는 인간뿐이 아니라 동물, 식물, 바이러스 등의 비인간 유기체, 기계와 같은 비유기체, 심지어는 그래프나 설계도와 같은 것까지 포함되며, 이런 행위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점으로 기존의 사회과학 분석틀에서 자리잡고 있던 경계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가령 과학과 기술의 경계가 붕괴하며 '테크노사이언스'가 탄생하고 학계에서 유행을 하게 된다.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완전히 뒤흔들은 비인간의 행위성의 발견은 이처럼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수잔 리이 스타는 우리가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Cui bono(누구에게 이익인가)?' 다. 비인간 행위자까지 네트워크에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는 네트워크가 어떻게 유지되고 어떤 문법을 가지고 있는지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 네트워크 내부의 권력을 이해하고 그것을 출렁일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은 그래서 이것이 '누구에게 이익인가?' 라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다층적인 자아


 

 
나는 오늘 마리 퀴리에 대해 읽고 있었다
그녀는 방사선 병으로 아프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제한 성분으로 인해 수년 동안 망가진 몸
그녀는 끝까지 부인했던 듯하다
자기 눈의 백내장의 원인을
그녀가 더 이상 시험관이나 연필을 쥘 수 없을 때까지
손가락 끝 피부가 갈라지고 고름이 나오는 원인을
 
그녀는 유명한 여성으로 죽었다 자신의 상처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힘과 똑같은 근원으로부터 왔음을
부인하면서
 
에이드리언 리치 <힘>
 
 

스타는 에세이를 시작하며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와 함께 다중의 자아와 쪼개진 개성의 예를 세 가지를 가져온다. 첫 번째, 대기업의 경영자인 중년 남성. 이 사람은 어떤 때는 고된 육체노동을 하고, 어떤 때는 미팅에 들어가 피칭을 하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놀아준다. 두 번째, 다중 인격 장애를 가진 소녀. 이 사람은 저번주에는 다른 이름을 썼고 다른 스타일로 옷을 입었었다. 이 장애는 주로 물리적 또는 성적 폭력으로 인해서 생긴다고 한다. 세 번째, 자신의 백인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라틴계 혼혈 여성. 그녀의 글을 읽는 대상이 대부분 페미니스트기에 그녀는 굉장히 폭력적인 언어로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자아는 단일하지 않으며, 다층적이다. 스타에 따르면 이 다층성이 나타나는 것의 이유는 세 가지다. 그럴 수 있는 권력이 있어서, 착취당해서, 그리고 변종적 타자성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다층성은 첫 번째 예시와 같은 경영자의 다층성이라기보다는, 착취당한 자의 다층성이자 혼혈 잡종의 다층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괴물, 사이보그, 불순한 존재다. 우리는 이런 다층성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에 단일함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자들이자, 경영자와 착취자에게 단일함을 내어주는 자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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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사이언스의 시대, 혼종적 정체성을 지닌 수많은 사이보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 린 랜돌프

 

 

그래서 스타는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은 인간의 네트워크를 미생물, 소, 기계 등의 비인간에게로까지 확장한다. 그런데 이 네트워크 이론이 한 개의 다양성, 한 개의 권력, 그리고 하나의 네트워크만을 보여준다. 온 과학기술학계가 다양성의 포용의 단초로 라투르의 비인간 행위자의 포함에 주목하고 있지만, 스타가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기술과 진실을 만들어낼 때 어떤 사람들의 관점들이 다른 사람들의 관점보다 더 큰 힘을 가지는가? 왜 그러고 어떻게 인간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들이 원하는 것에 함께할 것인가? 왜 그리고 어떻게 어떤 인간 행위자들은 네트워크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가?


수잔이 이 에세이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출발점’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네트워크를 분석할 때 누구의 입장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살핌으로써 네트워크 이론이 더 견고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양파 알러지에 대하여


  

스타는 굉장히 특수한 양파 알러지가 있다. 완벽히 조리되지 않은 양파에 알러지가 있는 것인데, 조금만 섭취를 하게 되어도 바로 소화불량과 복통이 온다. 이정도 알러지는 불편함의 스펙트럼에서 굉장히 사소한 편에 속하겠지만, 스타는 이 문제가 사소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에 구석구석 스며들어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개인, 기관, 그리고 표준화된 기술이 사소하게 어긋나있는 사람들과 관계맺는지 분석하는 데에 좋은 예시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수잔은 맥도날드에서 ‘양파를 뺀 햄버거’를 주문한다. 45분이 걸려 나온다. 이후 수잔은 다른 맥도날드에서 똑같은 주문을 하고, 30분이 걸려 나온다. 수잔은 맥도날드가 표준화 프로세스에서 벗어난 것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후에는 일반 햄버거를 시키고 포크로 양파를 긁어내는 것으로 타협한다. 수잔은 웨이터들의 불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레스토랑이 고급 레스토랑이든 집 앞 레스토랑이든 가리지 않고 양파를 분명 빼달라고  확실히 말했는데 그것이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아 기어이 양파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알러지는 무염식, 채식, 코셔를 하는 사람들처럼 수요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수잔은 항상 양파를 스스로 긁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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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중립적인 것으로 인식되다가 더이상 아닌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할 때 변화가 만들어진다. 이 변화는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자리를 잡게 된 비건 식품처럼 시장의 수요에 따라 천천히 등장하기도 하고 수화 통역과 같이 수요나 경제성이 없음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정치와 기술이 결합해 만들어지는 변화에는 이름표가 붙게 된다. 가령 ‘사용자 중심 디자인’, ‘특수 교육’, ‘배리어프리’와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름들은 우리에게 위험한 환영을 보여준다. 모두의 특수한 요구에 따라 시스템이 맞춰주고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기술이 확장하는 어떤 완벽한 유연함이 가능한 일 인 것처럼 표현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첫 번째, 관례적인, 그리고 표준화된 기술적 시스템과 개인의 니즈에는 필연적으로 어긋남이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맥도날드와 같이 고도로 표준화된 프랜차이즈의 경우에는 틈새시장이 발견되거나 소수였던 수요자가 급격히 늘어날 때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맥도날드가 캘리포니안들의 요구에 맞춰 샐러드를 만들 수는 있어도 스타의 수요에 맞춰 양파를 뺄 수 있는 햄버거를 만들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 표준화 프로세스에 맞지 않는 자들은 이 표준화 프로세스에 자신도 반영해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스스로 타협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그 표준화 프로세스는 점점 더 중립적이고 유비쿼터스한 것으로 인식되게 된다.


두 번째, 다양한 자아를 고려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가령 맥도날드가 모든 채식 옵션, 소금 양, 양파 등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도록 바꾸고, 코셔 전문 주방을 모든 가맹점에 설치하고, 저소득층에게는 무료로 배식을 하고 모든 식자재를 자신들의 유기농 농장에서 길러낸다고 하더라도, 그날 아침 개인 자영업자 살리기 캠페인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절대 맥도날드에 가지 않을 것이다. 개인 자영업자 살리기 캠페인이 참여하는 이 자아는 맥도날드가 알 수 없는 자아지만 그 사람과 맥도날드 사이의 네트워크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네트워크 이론에서 다양성의 논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Cui Bono? 누구에게 이익인가?


 

네트워크 이론이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떻게 특정 네트워크가 시간이 지나며 안정화가 되었는지이다. 거대한 네트워크에서는 그 존재론적인 위치와는 무관하게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변화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멈춰야 한다는 뜻으로 빨간색을 골랐을 때 그것은 완전히 임의적인 것이었지만, 너무 널리 관습적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이것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되돌릴 수 없음은 네트워크의 권력과 견실함을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다. ‘사실’은 실험실에서 태어나며, 우연성의 틈을 모두 없앰으로써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네트워크에서 권력도 유사한 과정을 따른다. 특정한 것이 만들어지고 표준화의 기준이 되면 그것은 행동을 만들고, 변화를 억제하는 등의 힘을 가지게 되어 점점 그 네트워크로 사람들이 유입되며 견고해지게 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극장, 대중교통,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상점들 등에서 이익을 얻는 것처럼 네트워크 속의 사람들은 이미 구조적으로 구축되어있는 기준들에 따르는 유지(mantenance)와 밀도 높은 커뮤니케이션에서 이익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네트워크 외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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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사람이 페이스북을 사용할수록 페이스북의 가치가 올라가며,

페이스북의 가치가 올라가면 더 많은 사람이 페이스북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수잔이 이때 주목하는 것은 ‘누가’ 네트워크 외부성으로부터 이익을 얻는가이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베커의 미학에 대한 논의를 가져온다. 왜 클래식 음악 콘서트는 항상 두 시간이고 벽에 거는 그림은 크기가 다 비슷비슷할까? 클래식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입장만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 반영되어 있다. 클래식 음악의 경우 음악을 들으러 온 사람들의 주차 시간, 끝나고 나서 건물을 청소할 시간 등을 고려해야 하고 이것들은 작곡가가 음악의 길이를 선정할 때의 힘만큼이나 강하게 콘서트의 길이를 정한다. 그림의 경우도 작가의 의도만큼이나 표준화된 사이즈의 트럭에 그것을 실을 수 있는지가 크기의 결정에 작용한다.


베커의 논리는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도 유효하며,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예술의 경우 개인작업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순진무구한 작가가 관습적인 규범에 벗어난 작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과학기술의 경우 여러명이 함께 지식생산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습들이 항상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과학혁명이 일어날 때처럼 격변의 시대에 이 관습들은 위태롭게 흔들리게 된다. 또, 이 관습들은 네트워크의 외부에 있는 자들에게는 항상 위태로운 것이다. 맥도날드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으로 똑같은 식품을 5분만에 제공해준다고 하더라도 맥도날드의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사람은 그것을 누릴 수 없다. 이 배제된 존재들은 혼란과 문제를 발생하는 원인으로 여겨진다.


다시 ‘출발점’의 논의로 돌아와, 수잔은 여기서 맥도날드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에 있어 전통적 네트워크 이론은 세 가지 출발점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맥도날드를 안정적인 네트워크로 보는 것, 혼란의 원인으로 보는것, 또는 안정적인 네트워크이자 혼란의 원인으로 보는 것. 하지만 수잔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뒤섞임에 찬사를 보내는 것보다 cui bono(누구에게 이익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이 분석적으로 더 흥미로우며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다."

 

 

 

하이 텐션 존


 

스타는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교에서 페미니즘 이론을 가르치던 도중 만난 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잰은 겉보기에도, 이름도 안드로제너스했기에 스타는 잰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날 잰은 스타에게 자신이 성전환 수술을 고려하고 있으며, 최근 호르몬 주사를 맞아 가슴이 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잰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엄청난 하이 텐션 존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사람들은 이런 저를 감당하기 힘들어해요. 그들은 제가 이것, 또는 저것이길 원하죠." 하지만 잰은 자신이 남성으로 패싱될때와는 달리 여성으로 패싱될 때 페미니즘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등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어떤 가능성을 가지는지 점점 더 깨닫게 되는 중이라고 말한다.


잰은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보험사에게 자신이 정말 여성이 되고 싶음을 증명해야 했고, 여성 패싱으로 2년 이상 옷을 입고 머리를 기르도록 강요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부장제 위에 만들어진 의료계에서 성전환 수술이란 가능하면 빨리 '하이 텐션 존'에 있는 사람을 지우고 이것, 또는 저것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스타는 이런 질서를 가진 세상에서 잰이 사이보그와 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잰은 여러 개의 세계에 속해있고, 그렇기에 네트워크를 볼 때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표준화된 네트워크 속 권력주체가 착취를 하는 법은 비슷비슷하지만, 그 착취에 반해 일어나는 반동은 다양하다. 잰은 다양한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은유


 

우리는 모두 하나 이상의 공동체의 일원이고 그렇기에 수많은 네트워크의 행위자다. 우리는 행위자로서 네트워크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에서 은유들을 만들어내며 서로를 연결한다. 권력은 누구의 은유가 여러 개의 세상을 끌여들이고 붙여 고정시키는지에 대한 문제다. 은유는 상처를 치유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고, 무언가를 지우거나, 위반하거나, 목소리를 내거나, 여러가지 목소리를 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던 비인간마저도 적극적인 행위자가 된 테크노사이언스의 세상에서 우리는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수많은 행위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구축자 중심의 세상이기에 네트워크에서의 소수자들은 일상적으로 배제와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수잔에게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복수의 네트워크에 속해있는 이 괴물 사이보그들은 억압받는 수동적 객체들이 아닌 네트워크의 힘의 방향을 전복시킬 수 있는 자들이다.


스타는 양파 알러지가 있는 사람을 위한 틈새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나 양파 알러지를 가진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함이 있는 세상을 목표점으로 하길 거부한다. 이 방해꾼들은 네트워크가 자신에게 맞춤정장을 만들어주길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되려 그들은 적극적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존재함으로써 네트워크의 권력구조에 문제제기를 한다. 그들은 유비쿼터스해보이는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그 이야기들은 네트워크 내부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상과는 완전히 딴판이고, 어쩌면 그들이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스타는 우리가 이 이야기들에 귀기울이기를 요청한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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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수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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