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빌려온 젊음

요즘 나의 생각들
글 입력 2021.05.3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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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년전쯤의 어느 날이었다. 당장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흐린 날이었다. 날씨 때문인지 집 안의 공기들이 나를 슬쩍 누르고 있는듯 했다.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의 무게는 아닌, 또 그렇다고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닌, 딱 소파에서 생각만하고 직접 일으키지는 못하는 정도의 무게였다.

 

아마 누군가가 ‘오늘 기분은 어때?’라고 물었다면 그 어떤 대답을 해도 거짓말이라 느껴질 날이었다.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런 묘한 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는데 문득 창문 쪽에서 빛이 들어오 듯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해가 드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하늘은 여전히 칙칙한 회빛이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보니 무언가 이질적인 모습에 나는 홀린 듯 창문에 다가섰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맞은편 아파트는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그 뒤로는 깊은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바다가 연결된 모습이었다.

 

흰 구름, 아니 곧 떨어질 물방울들을 머금은 회빛의 구름 하늘과 저 멀리 지평선 쪽의 안개를 덧씌운 듯한 남색의 빛깔은 경계없이 풀어져 있었다. 마치 마그리트의 붓이 지나간 모습처럼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던 흰 아파트와의 대조 때문인지 나는 꿈을 꾸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2.

인터넷에서 폐경에 관한 글을 읽었다. 여성의 폐경은 일반적으로 49세쯤 시작된다고 한다. 따라서 30대부터는 폐경에 대한 준비를 해야한단다. 나는 한동안 멍했다. 아직은 먼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당장 몇 년 뒤부터는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준비조차 몇 년은 남은 것이지만 나는 이른 폐경을 눈 앞에 둔 30대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준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준비를 위한 준비만이 있을 뿐 절대로 완결은 없다. 그러니 발버둥 쳐도 더욱 깊은 덫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준비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냥 겪을 뿐이다.

 

 

3.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울어제끼며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준비를 한다. 그들의 애정을 얻어내 고통보다 행복을 크게 만들며 내게 필요한 충족감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요구의 표현으로써 울음을 터트린다.

 

갓난아기는 스스로 준비할 수 없다. 그 동안은 보호자가 준비를 대체한다. 점점 자라나고 세상에 대해 알게 될수록 준비는 스스로의 몫이 되어가며, 준비의 끝은 죽음만이 유일하다는 것을 알게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젊음에 대한 빚을 진다. 그리고 평생을 써서 갚아 나간다. 아무리 내가 빌리려 하지 않았다고 외쳐도 소용없다. 외침에 대한 응답을 듣고 억울함을 풀어줄 이는 우리들 사이에 없다. 그가 신이든 어머니 대자연이든 말이다. 그러니 억울해도 어쩌겠는가?

 

어쩌면 부모가 해주는 잠시 동안의 준비는 요구하지 않은 빚에 대한 보상 일지도 모른다.

 

 

4.

봄과 가을은 참 짧다. 그리고 아름답다. 대부분의 계절은 여름과 겨울이 차지한다. 지나치게 내리쬐거나 삭막하다. 삶에서의 아름다움 또한 그렇다. 젊음의 힘은 제멋대로 날뛰어서 스스로를 태운다. 그렇게 태우고 태우다 더 이상 남지 않을 때 모든 것은 마치 물 속의 몸처럼 느릿해진다.

 

 

5.

거울 속 내가 보인다. 내가 빌려온 젊음이 보인다. 피부는 여리고 매끄러우며 눈빛은 반짝인다. 웃음은 한 여름 호수처럼 파랗고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들처럼 유쾌하다. 조금 더 바라보면 내가 빌려온 시간이 보인다. 마치 강물처럼 시간은 흐른다. 나의 피부, 머릿결, 웃음, 총기. 그것들이 흘러 흘러 굽이치는 것이 보인다.

 

그래, 나의 아름다움은 저물 것을 알기에 아름답다. 저무는 것들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들은 필히 저문다. 그것이 슬프다. 사무치게 슬프다.

 

 

6.

일년 전에 마주한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나의 젊음은 빛을 받은 흰 벽처럼 눈부시다. 그러나 그 뒤로 몰려오는 먹구름은 늘 시야에 걸린다. 다만 그 먹구름도 아름다웠음이 아른거린다. 그 순간 꿈을 꾸는 듯한 푸른빛은 참 기묘하고 슬펐다. 그 깊이에 현혹될 정도로 말이다.

 

생동하는 삶들은 모두 그 뒤의 푸른빛이 배어 나온다. 그리고 깊은 밤의 어둠이 올 때까지, 천천히 젖어 나가겠지.

 

 

[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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