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것은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글 입력 2023.12.2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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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의 광풍이 문화예술계를 마구 휩쓸고 있는 요즈음이다. 작금의 시류가 과연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형태로 스며들고 있는가의 문제는 일단 차치해 둔다고 하더라도, 해당 열풍이 이미 수많은 이들의 폭발적인 지지 내지는 반감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비교적 자명해 보인다. 과거에는 전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고 간주되지 않았던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들이 서서히 무대의 중심에 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반작용이라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대의 가장자리, 혹은 오로지 무대의 뒤편에만 존재해 왔던 그들은 이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히 관객들의 눈앞에 자리하고 있다. 여성이 그러하고, 동성애자가 그러하며, 장애인, 그리고 흑인 등이 그러하다.

 

최근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고 있는 일련의 변화 속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단연 여성 서사의 약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물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 있어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거나, 핵심적인 활약을 펼치는 경우는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생경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미디어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여성 인물들이 과거와 달리 단순히 남성을 보조하는 노릇을 수행하는 데서 그 역할을 그치거나, 관객들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용도의 객체적 대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은 가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법하다.

 

다만, 미디어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주체성을 고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여성 중심의 서사를 강조함으로써 다소 작위적인 인상을 자아내는 몇몇 창작물들이 여성 서사에 대한 일부 소비자들의 반감을 크게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물론 최근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대부분의 창작물들이 남성 중심의 서사를 바탕으로 제작되어온 만큼, 직접적인 물량 공세를 통한 일종의 충격 요법이 기존의 창작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있어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는 있겠으나, 이러한 양상으로 인해 훌륭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창작물들조차 단지 그것이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 소비자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상황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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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호러 코미디 영화 <고스트버스터즈>(1984)의 리부트 작품을 자처하며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던 <고스트버스터즈>(2016)는 여성 중심의 서사가 마치 남성 중심 서사의 대척점에 위치한 존재인 것처럼 인식될 경우, 그것이 소비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커다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고스트버스터즈>(2016)는 작품이 공식적으로 공개되기 이전부터 수많은 홍역을 치르며 당해 최고의 문제작 중 하나로 꼽힌 바 있는데, 이는 해당 영화가 여성 코미디언 4명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며 남성 주역 4인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기존의 남성 서사 작품을 철저하게 여성 중심의 서사로 탈바꿈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리부트 작품을 자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설정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듯한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해당 영화를 향해 쏟아지던 팬들의 분노는 기어이 젠더 이슈에 입각한 첨예한 대립의 발생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원작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비롯되었던 지탄의 목소리가 여성 중심의 서사 그 자체를 향한 반감으로 확장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영화의 리부트를 진행함과 동시에 해당 작품에 등장했던 남성 주인공들을 전부 여성으로 변경한다는 것은 곧 검증된 IP를 활용하여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유행성 시류에 편승하겠다는 얄팍한 편의주의적 심산처럼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사랑하던 영화가 특정 젠더 이념의 이슈화를 위한 여성 중심 서사의 의도적 주입에 의해 훼손되었다고 느낀 원작 팬들이 여성 서사 그 자체에 커다란 거부감을 드러내게 된 것도 커다란 무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스트버스터즈>(2016)가 썩 훌륭한 영화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으나, 단독 작품으로서 그렇게 형편없는 작품은 또 아니라는 점이다. 나름의 공포와 유머로 점철된 해당 작품은 킬링 타임용 오락 영화로서 꽤 준수한 수준의 재미를 선사한다. 만약 이 작품이 리부트 영화가 아닌 여성 주연의 오리지널 영화였다면, 일부 관객들로부터 '시시껄렁한 팝콘 무비'라는 비아냥을 들었을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과 같이 수많은 이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여성 중심 서사가 남성 중심 서사를 무대의 중심으로부터 밀어내기 위한 의도성을 지닌 도구적 수단으로 활용될 경우, 오히려 그 반작용에 의해 작품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무대의 변방으로 다시 밀려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조금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진정 여성 중심의 서사가 남성 중심의 서사와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자연스레 소비되기를 바란다면, '여성'을 작품의 전면에 과도하게 내세우는 전략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숙고를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성을 주연으로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의 소비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결국 '여성' 서사가 아닌 여성 '서사'의 형태를 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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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2016년에 개봉한 이현주 감독의 영화 <연애담>은 모범적인 여성 서사의 전형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험난한 사회 속에 아직 온전히 자리잡지 못한 두 20대 여성 간의 사랑을 담은 <연애담>은 그 제목 그대로 미숙한 청춘의 시기를 겪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쉬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연애담을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두 인물은 모두 여성이지만 이 영화는 여성 서사의 관습적 매력에 열렬히 기대지도, 남성 서사의 지배적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작위적 노력을 펼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묘사함과 동시에 그들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풀어내는 데 집중할 뿐이다.

 

이는 해당 작품이 '여성 퀴어 영화'라는 어찌 보면 다소 급진적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소비자들에게 커다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연애담>은 여성 중심 서사가 충분히 서사 그 자체로서 관객들에게 매력을 호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증명하며 당당히 무대의 중심에 안착하였다.

 

한편, 해당 영화를 통해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하는 등 촉망받는 신인으로 떠오르던 이현주 감독은 이후 동료 감독에게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영화계에서 불명예스럽게 은퇴한 바 있다. 부정적인 이면을 드러낸 사건이기는 하나, <연애담>을 통해 여성 서사의 메인스트림 진출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던 그녀가 해당 사건을 통해 의도치 않게 여성에 대한 사회의 고정적 프레임을 타파하는 데까지 기여했다는 사실은 꽤나 묘하게 다가온다.

 

<연애담>이 작품 내적인 차원에서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여성 서사가 충분히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면, 이현주 감독의 사건은 작품 외적인 차원에서 성범죄의 가해자는 대개 남성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리 사회의 관습적 통념을 깨부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연애담>은 여성 서사가 항상 남성 서사의 대척점에 위치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물론, 현실에서의 여성 역시 결코 사회의 고정적 인식과 프레임에 의해 일반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각인시켜준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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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confusing. Is it sexist to hit you? Is it more sexist to not hit you?

(여성에게) 헷갈리네. 너를 때리는 것과 안 때리는 것 중 어느 게 더 성차별적인 걸까?

 

- 팀 밀러, <데드풀> 中

 

 

실패한 여성 서사 작품들의 공통점은 결국 해당 작품들이 여성에 대한 사회의 고정적 프레임을 전혀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프레임 내에 안주하며 검증된 관습적 서사를 따르든, 기존의 프레임을 무너뜨리기 위해 파격적 시도를 단행하든 간에, 여성에 대한 프레임을 향한 의식적 자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대개 작위적이고 어설픈 인상만을 풍기게 될 뿐이다. '여성'이 아닌 '서사'에 집중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낼 수 있을 때, 그리고 사회적 프레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성별에 대한 모든 성역을 깨끗이 걷어낼 수 있을 때, 여성 서사는 비로소 진정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서사 작품이 결코 '그녀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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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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