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시없는 순간들이 꽂혀져 있는 감정의 책꽂이에서 [문학]

고전 작품: 가장 빈번하고 확실한 낭만
글 입력 2021.04.0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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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외할머니 댁에는 오래된 장이 하나 있다. 필자와 거의 동갑내기인, 20년도 더 된 그 장롱을 열면 그간 쌓여진 시간의 정취가 물씬 난다. 필자는 겪어 보지 못했던, 할머니만의 시간이 그 향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그 장롱에는 작디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모래성을 이루어 내는 것처럼, 그간의 할머니의 시간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 장롱을 사랑한다, 어쩌면 할머니가 그 장롱을 아끼시는 마음보다 몇 걸음은 더. 그 장롱은 필자가 할머니와 함께 보내지 못한, 필자가 태어나기 이전의 ‘과거’의 시간들을 ‘현재’의 필자가 향기라는 방법으로 겪어 볼 수 있게 해 준다.

 

필자에게 외할머니의 장롱과도 같은 것이 바로 ‘고전 작품’이다. 현재와 손을 꼭 잡고 살아가다, 지금 자신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감정이라면 좋겠다고 필자는 종종 소망할 때가 있다. 필자와 필자의 과거를 만나게 해 주는 것은 매번 다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고전 작품’이 필자를 과거의 감정으로 데려가는, 가장 빈번하고 확실한 낭만이다.

 

이번 글에서는 필자의 여러 낭만 중 하나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문장들을 소개하려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금 깨달았던 사실은, 고전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글자로 뱉어내는 그 ‘마음의 소리’들이 필자의 과거에 대한 감정에 ‘통찰’이라는 옷을 입혀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느꼈던 과거의 그 감정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아직 느껴 보지 못하였거나 곧 느낄 감정들을 미리 연습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감정들을 두고 두고 음미하며 통찰할 수 있게 해 준다.

 

 

내가 이제까지 늘 하던 대로 운명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조그마한 불행을 부질없이 되씹던 그런 습관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  … 친구여, 만일 인간이 그처럼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나간 불행에 대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현재를 무난하게 참고 견디어나간다면 인간의 고통은 훨씬 줄었을 거야.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p.12

 

 

주인공 베르테르와 필자가 가장 가깝게 닿아 있는 지점이 바로 ‘현재’를 대하는 태도이다. 필자가 현재를 바라보는 태도와 단 한 구석도 다름 없이 똑같았고, 현재를 대하는 태도를 이러한 어휘들을 사용하여 풍성하고 간결하게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음에 감탄하였다.

 

결국은 습관이다. 습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것은 곧 우리의 생활과 삶을 지배한다. 필자는 스무 살 때 ‘과거를 후회하기’라는 습관을 저 밑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 나니, 그리움이나 추억 때문에 뒤를 돌아본 적은 있어도,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 본 적은 결코 없게 되었다. 삶을 살아갈 때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지게 되는 여러 짐들 가운데 가장 큰 짐을 버린 셈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이상적인 삶의 즐거움마저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행복한 사람이 한 명 완성되는 것인데, 이처럼 완벽하게 이룩된 사람이란 사실은 우리 스스로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p.104

 

 

과거를 후회하는 것만큼이나 필자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안겨 주었던 것은 바로 ‘하릴없는 비교’였다. 이것은 그저 나를 깎아 내리려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그리고 그를 항상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행복한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러한 사람은 단언컨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 자신’만’ 불행하다는 색안경을 쓰고, 타인을 나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나만의 ‘창조물’로 만들어 놓고 부러워하고 질투하던 어린 날의 필자 자신을 떠올려 보고, 건강하게 비교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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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세계의 모든 것이, 오직 그녀와 관련되어서만 내 눈에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다시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마련해 준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p.91

 

 

필자가 과거에 느꼈던 여러 감정들이 뒤죽박죽 꽂혀져 있는 책꽂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꺼내어 찬찬히 읽어 볼 수 있게 해 준 구절이다. 이 구절이 ‘낭만’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에 놓여져 있는 여러 자리 중, 우리의 신경이 가장 오래, 그리고 자주 닿는 곳에 그 사람이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 사람 주변의 다른 자리들에는 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시선, 생각, 감정 등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곧 나의 ‘생활’에 스며 든다. 습관인 줄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쉬듯이 하는 행동처럼, 줄곧 나의 삶이었던 것처럼. 이것을 베르테르는 ‘주위 세계의 모든 것이 그 사람과 관련되어서만 내 눈에 비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다시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마련해 준다.’

 

다시없이.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정말이지 다른 것은 일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한 것만 생각하던 그 순간, 그 일상, 그 하루.

 

매년 봄에 벚꽃은 항상 아름답게 팝콘을 터뜨리지만, 2021년의 벚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시없을 벚꽃이 매년 피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향했던 순간들은 ‘다시 없을’ 그 해의 벚꽃인 듯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내 신경을 쏟았던, 다시없는 그 순간들을 떠올려 보며 필자는 이 구절에 담긴 베르테르의 진심에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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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작품의 문장들은 한 가닥, 한 가닥을 정성스레 빗어 놓아 햇빛 아래서 따사로이 찰랑거리는 머리칼이다. 그 단어들이 빚어 내는 문장들의 소리는 ‘섬세함’이라는 어휘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섬세함보다 ‘더’이다. 왜냐하면, 그 문장들의 표현에는 우리의 ‘감정’이 입혀지기 때문이다.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순간의 감정’들을 정말 감정에 오롯이 충실하여 문장들에 쏟아낸 책이다. 순간, 현재. 이러한 찰나의 것을 중요시하는 필자와 꽤 비슷한 결을 가진 책이었다.

 

찰나의 것은 짧지만, 강렬하다. 그리고 기꺼이 온 힘을 다하여 무모할 수 있기에, 이후의 것과 앞으로의 것에, 절대 찰나이지 않을 길고 긴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 찰나의 것은 베르테르가 이 책에서 자신의 감정을 한 줌도 남기지 않고 그 ‘찰나’의 영향을 받는 자신의 심정과 결단들을 말 그대로 ‘콸콸’ 쏟아내게 한다.


잔잔한 마음의 풍경에 감정의 불꽃놀이를 터뜨려 보고 싶다면, 자신이 언젠가 느꼈던 그 찰나의 감정의 고동에 다시금 흠뻑 울려 보고 싶다면. 오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함께 겪어 보는 것이 어떨까.

 


[김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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