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울타리 안의 온기 - 조의 아이들

주어져 마땅할 온정에 대해서
글 입력 2020.10.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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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타리의 존재


 

조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에 먹구름이 낄 때 항상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의 희망과 계획이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어른들은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279)

 

어린아이에게 선한 원칙을 심어주는 일은 얼마든지 일찍 시작할 수 있어.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고 해서 선한 원칙을 키워주는 일도 늦었다고 포기해서는 안 돼. (383)

 

플럼필드 학교에서 일어나는 성장통. ‘작은 아씨들’의 후속작이다. 이번엔 학교 안 아이들의 이야기다. 제각각의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조가 세운 플럼펄드의 학교에서 성장해나가는 과정. 루이자 메이 울컷이 가진 문체의 동화적인 성격이 여전히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 동화적인 문체는, 마치 플럼필드를 이상적인 울타리처럼 여기도록 한다. 그 가운데에는 인자한 품성을 가진 조와 바에르가 있다. 어쩌면 아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인격적 존중을 받는 게 당연시되는 존재. 앎이 부족해 저지르는 부족함을 보듬어줘야 하는 존재. 조와 바에르가 생각하는 유년기 아이들이란 그런 존재였다. 아이들이 ‘아이로서’ 사랑을 받는 건 당연했다.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이 내내 들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겐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갓 발을 디딘 생명들에게 결핍의 정도가 성인보다 크다는 것은 자명하니 말이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든, 정신적인 차원에서든. 그림으로 따지자면 백지상태의 도화지와도 같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제대로’ 채워주는 몫은 어른들에게 있었다. 조와 바에르 교수는 그 사실을 꾸준히 플럼필드의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보여줬다. 때로는 그들이 너무 따뜻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거리감을 느꼈다.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상 가정”에서 자라난 듯 보였던 주변의 친구들도 책을 읽으면 나와 같은 거리감을 느꼈을 게 분명하므로, 비단 내가 특출하게 열악한 가정환경에 놓여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듯하다.

 

조와 바에르, 그리고 주변의 어른들이 학교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애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성격의 애정이 아니었다.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종교인이 보여줄 법한 헌신에 가까운 사랑이었다. 매 상황에서나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분노를 일절 보이지 않고도 그들을 타이르는 인내심. 실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감정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라는 점을 특히나 인지한 상태에서 발휘되는 애정, 그것으로 견고해지는 울타리. 플럼필드는 그런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환경이나 기질에 상관없이 ‘어린 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 보호받았다. 골칫덩어리 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조네 부부는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댄이었는데도, 그 역시 미성숙한 아이라는 점을 단호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댄에게 사랑을 줬다. 결과적으로 댄은 울타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속으로 조금은 울었던 것 같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동화를 읽는 듯한 감상에 빠져서가 아니었다. 문장에 서려 있는 온기가 지독하게 사실적이어서, 저런 종류의 사랑과 존중이 아이에게도 주어질 수 있음을 깨닫고 부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유년기를 둘러싼 시간들이 다소 얄팍했음을 또 다시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유치하지만, 나에게도 저런 울타리가 주어졌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타인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지 않았을지. 애정을 건넨다는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지, 하고 아쉬워했다.



 

2. 믿을 구석이 아닌, ‘한가운데’


 

“사랑이라는 꽃은 어느 땅에서도 잘 자라기에, 가을 서리나 겨울 눈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 달콤한 기적 속에서 1년 내내 아름답게 만개한 그 꽃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모두를 축복하고 있었다.” (524)

 

댄은 다루기 힘들 만큼 성격이 충동적이었고 감정 기복이 심했으며, 무법자 같은 기질도 강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애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이 플럼필드에 대한 기억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을 실망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많은 결점이 있는데도 항상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해 준 동료들의 관심을 잃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그 애정을 지켜나가게 해주는 힘이었다. (625)

 

플럼필드에서 아이와 어른이 마주했던 사랑은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 때 단발적으로 기댈 ‘구석’이 아니라, 믿음의 ‘한가운데’로 자리했다. 자꾸만 댄만을 언급하는 것 같아 편애적인 시선이 드러난다고 보일 수 있겠지만, 변화의 구심점으로 그를 언급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지적이라면 애써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 점이 참 마음을 쑤시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우리들이 ‘한가운데’라는 성격을 지닌 애정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는 그만큼의 사랑을 어른에게서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을테니 말이다. 어른들은 항변한다. 누군가의 부모로, 보호자로 서는 경험은 자신도 처음이기에. 미숙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고, 아이들은 그 점을 어느 정도 이해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항변에는 분명히 자신들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미성숙한 기질이 있다는 진심이 묻어나오기에 일견 애처롭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합당한 변명 아래에서, 순간이나마 ‘부모의 속을 썩이는’ 존재라 규정당하며 인격성을 부정당하는 아이의 심정은 상당히 비참할 것이다. 그 아이가 저지른 잘못이 명백하더라도 어쨌거나 아이는 아이니까. 논리적인 결함이 많아 우스워 보이는 말이지만, 아이는 아이이기 때문에 잘못을 추궁하더라도 방식을 달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내내 떠나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존재성을 부정당한다는 참혹함이, 어린아이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큰 절망으로 다가올 것인지 생각하면 더욱이 그러하다. 무언가라도 그려진 어른들의 그림과는 달리, 그렇게 ‘판단할’ 거리들을 충분히 갖춘 그림의 형태와 달리 아이들의 도화지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크레파스를 쥐고 무엇인가 잘못된 걸 그릴 때, 애정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행위까지 좌절당할 수준으로 크나큰 비난이 가해진다면. 아이에게는 믿을 수 있다는 구석조차 사라질 테다.

 

이런 위험을 피하고, 현명하고 다정한 애정을 줄 자신이 없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미래의 가능성마저 포기했다. 어쩌면 이 책은 그런 내 마음가짐 탓에 더욱 한 편의 동화처럼 다가왔던 것일지 모른다.

 

 

 

실무진 명함.jpg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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