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트콤의 미학 [TV/드라마]

30분이 지나면 모든게 원래대로 돌아오는 마법
글 입력 2020.10.0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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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풍미한 미국 시트콤으로 <프렌즈>가 있다. 프렌즈는 미국 NBC에서 방영된 시트콤으로 총 10개의 시즌이 있을 정도로 흥행한 작품이었다. 모니카, 로스, 챈들러, 조이, 레이철, 피비. 뉴욕 맨해튼에서 살아가는 여섯명의 일상을 담은 드라마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았다.

 

프렌즈의 독특한 캐릭터와 스토리 외에도, 극 중 등장하는 대사들이 쉽고 센스있다는 점에서 프렌즈는 많은 사람들의 영어 공부 교재로 쓰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 멤버인 RM도 프렌즈를 보고 영어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재미 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난 드라마이지만, 몇년 전 내가 프렌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정도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칭찬일색인 드라마라서 더욱 기대가 컸던 걸지도 모른다. 기대감을 갖고 시즌1의 에피소드들을 보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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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이 항상 만나는 카페인 센트럴 퍼크(Central Perk). 이야기는 보통 이 카페나 모니카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20분 남짓한 시간동안 인물들이 우당탕탕 벌이는 사건들은 웃기긴 했으나 에피소드 간의 연결고리가 느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소드 1을 본 후, 2를 건너뛰고 바로 에피소드 3을 보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는 뜻이다.

 

당시 나는 형사 드라마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프렌즈 직전에 본 드라마가 트루 디텍티브, 루터, 보디가드 등 앞뒤 인과관계가 뚜렷하고 촘촘한 장르물을 보다가 시도해본 시트콤은 뭐랄까,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내게 너무나도 밍밍한 맛이었다.

 

2년 전의 나는 프렌즈 보는 것을 중도 포기하고 다른 형사 드라마를 찾아나섰다.


 

 

시트콤을 보게 된 이유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시트콤에 빠져버렸다.

 

계기는 책 만들기였다. 장마가 유난히 길던 이번 여름 나는 독립출판 수업을 듣기 시작했었다. 나만의 컨텐츠를 만들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업 장소는 해방촌에 있었고, 나는 친구와 함께 매주 주말 수업을 들으러 갔다. 이상하게도 수업하는 날만되면 아침부터 굵은 비가 솨아아 내렸다. 계속 비가 오지 않다가 수업 가려고 문을 열자마자 비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적도 있었다. 이 정도면 세상이 우리의 수업을 방해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굵은 비였다.

 

빗줄기를 뚫고 수업을 들으러 가면 나는 항상 나의 부족함과 싸워야했다. 책에 넣을 컨텐츠를 구상하면서 시도때도 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내 글과, 현재 노트북 위로 적어내려가는 글 사이의 간극을 바라보는 건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나의 부족한 글을 마주하다가, 수업 끝나고 나면 다시 비닐우산을 펼쳐서 빗줄기를 겨우 피한채로 집에 돌아왔고 그러고나면 완전히 방전되곤 했다. 몸과 마음이 지쳤고, 몇주동안 수업을 듣는 동안 나는 불안의 정도가 높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도중 만난게 바로 넷플릭스의 시트콤인 '보잭 홀스맨'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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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부 보잭 홀스맨에 나오는 캐릭터들이다.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고 코에 손을 얹은 말이 바로 주인공인 '보잭 홀스맨' 이다. 그림만 보아도 느껴지는 건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힘들어 보인다는 것이다. 보잭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분홍색 고양이인 프린세스 캐럴린, 왼쪽에 등장하는 다이앤, 토드도 마찬가지로 지쳐보인다. 그림에서 유일하게 여유가 있어보이는 사람은 뒷통수에 가만히 양팔을 얹어놓은 미스터 피넛버터뿐.

 

벌써 줄거리가 예상되는 듯한 이 피곤한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건, 독립출판 수업을 듣고 돌아온 어느 여름 밤이었다. 그날도 역시나 지쳐있었는데 커피를 마셨더니 잠이 오질 않아 넷플릭스에 들어간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가 금방 끝나버렸다. 이 글에 등장하는 그림처럼, 하나같이 피곤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진 인물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는 걸 느꼈다.

 

 

 

30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마법


 

 

 

보잭 홀스맨 시즌1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인생은 요도를 걷어차이는 고통이라 종일 요도를 걷어차이다 드디어 집에 오면 착하고 호감 가고 정 많은 이들에 대한 방송이 보고 싶죠. 시트콤에선 어떤 일이 벌어져도 30분 후면 다 괜찮아지니까요."

 

나는 이게 시트콤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시트콤에서는 30분만 지나면 모든게 원상복귀된다. 보잭홀스맨에서는 보잭이 온갖 수모를 당하고, 기분 안 좋은 일을 당하거나 별일이 일어나지만 한 에피소드가 끝나면 'Back in the 90's-' 로 시작하는 엔딩송이 나오며 이야기가 끝난다. 그리고 곧이어 시작되는 새로운 에피소드에서, 보잭과 다른 인물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다는 듯한 평온한 얼굴로, 이 전 에피소드와 똑같은 장소에서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이렇게 깔끔할 수 없다.

 

그럼 나는 평온한 등장인물들과 같은 깨끗한 마음으로 다음 에피소드를 마음 편히 시청한다. 누군가에겐 별볼일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평범한 스토리가,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가져다준다. 시트콤 특성상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법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져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등장하는 주인공을 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위안을 얻는 것도 같다.

 

요즘도 글쓰다가 힘들 때면 보잭홀스맨을 틀어서 맘놓고 웃는다. 아, 이 얘기를 빠뜨릴 뻔 했는데 시트콤의 또다른 매력은 바로 언제든지 재생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컨텐츠가 그런거 아닌가 싶지만 요즘 방영하는 드라마인 비밀의 숲만 보아도 중간에 멈추는게 쉽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매 회차의 결속력이 높기 때문에 중간에 멈추면, 왠지 중요한 포인트를 못 본 것 같은 찝찝함이 남는다. 하지만 시트콤은 그런 것 없이 중간에 멈춰두었다 다음에 다시 오면, 그 지점에서 나를 한결같이 반겨준다. 어쩐지 반려견 같은 모습이다.

 

시트콤이 좋아졌다, 라고 말하는 날이 오게 될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보잭 홀스맨이 끝나면 프렌즈를 시작해야겠다.

 

 



[최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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