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원히 찬란할 슬픔의 봄 -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공연]

봄은 환히 빛나는 슬픔 같다.
글 입력 2020.08.1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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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좋다.

 

왜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냥 좋다고 할 것이다. 그것에 미사여구 붙이고 싶지 않은 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밤은 주로 이런 것 같다. 오늘따라 유달리 연극이 겨운 이 밤은, 아무래도 내 한 편의 봄을 목도한 까닭이 아닐는지. 봄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은 아무래도 따순 날 병아리 조는 풍경을 연상시키지만, 나인 봄과 너인 봄을 이리 보노라면 그렇지만도 않었다. 봄은 환히 빛나는 슬픔 같다.

 

혜화동 아트원씨어터에서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보고 돌아오는 밤, 나는 한 편 봄을 보고 나왔다. 당연한 듯 나는 그 봄 위에 떠오른 내 늦봄을 상기하게끔 되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 내가 아직 봄인 까닭이다. 봄이 지나고 난들 그러나 다르랴. 봄은 언제까지나 추억의 속성을 띄고 있을 듯싶다.

 

소극장 특유의 객석에 앉어 청춘인 배우를 보고, 그 배우가 연기해 낸 누군가의 청춘을 본다. 나는 두 개의 청춘을 보는 셈이다. 그들은 싱긋거리었으나, 그것은 꽃이 내는 하나의 춤사위에 불구한 것. 그 안의 수액에 감추어진 구구절절한 서사를 나는 모른다. 그것은 아마, 너희에 대한 나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이상스런 생각을 안고, 여기 앉은 소극장 객석은 언제나 무대와 가까워 나는 여러분을 면밀히 본다.

 

저기 청춘의 얼굴에는 조명이 내리쬐어 그림자가 어리어 있다. 나는 이렇듯 두 개의 봄을 관찰하고 있자면, 즉 샛노란 조명과 그것의 어리는 그림자를 동시에 보고 있노라니, 나를 발견한다. 그리곤 어느샌가 슬며시 얼굴도 모르는 그 숱한 나의 동지, 청춘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제 홀씨를 부둥켜안고 있는 민들레가 지평선 위로 다른 홀씨들을 떠올려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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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즉 극의 시작 전으로부터 극의 내내를 관통하여 극의 끝마침에까지 줄곧 제창되는 그들의 이야기. 봄이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 이전에 우리가 ‘그’ 찬란함을 바라야만 하는 일. 병아리 재우는 춘곤의 빛깔은 분명 눈부시듯 샛노랗지만, 나는 또한 나인 그 계절이 찬란함이라는 속성과 얼마나 가까운지 언제나 자문해보곤 한다.

 

우리가 그저 찬란하였던가 멋모르는 얼굴로 묻노라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겠다. 우리가 찬란할 수 있었던가 묻노라면 나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하겠다. 아니, 그 찬란함이 무엇이냐고 먼저 묻겠다. 청춘인 봄에 걸맞는, 그 찬란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환상함으로써, 무엇 꿈을 가짐으로써 찬란한 슬픔의 봄을 겪고 알게 되던지……

 

*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대학생들의 이야기이다. 대학생과 동아리와 MT와 연극과 학교축제와 술자리와 술게임과… 언제까지나 아련할 이야기.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극은 내게 그리움을 권한다. 언제나 지나고 나면 잊히는 많은 것들의 가운데를 오롯 홀로 떠오르는 빛나는 것들, 그래 추억이라는 것들 말이다. 이 그리움은 그것만을 떼어놓고 보았을 때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자칫 찬란하다고 이야기해버릴 법도 하다. 그래, 그것만 떼어놓고 보았을 때 그렇다.

 

그리고 그 곁에 숱한 이들의 숱한 사연들이 입히면, 그것은 애석해지다. 돌아보자니 찬란한 것도 같거니와 그렇다고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무언가 왈칵 안으로 밀어 차 들어오는 이것, ‘찬란한 슬픔의 봄’의 다른 말은 환상을 깨어낸 추억이다. 나는 그 대학생들의 이야기 속에 영그는 나의 시절을 떠올리고, 잠깐 추억하다간 이내 환상을 깬다. 그 꿈을 깨뜨리는 이것이 너와 나의 사연일 것이다.

 

저 추억 위에 누군가의 가난과 누군가의 이별과 누군가 겪는 창작의 고뇌와 누군가 겪는 숱한 거절과 누군가의 면접 탈락과 누군가의 비극과 누군가의 가정환경이 덧입히면 환상은 깨어진다. 아마 추억 속에 이 사연마저 잠드는 먼 훗날에야, 이것은 마침내 오직 찬란함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아무래도 너와 내가 아직,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라고 할 만큼 살아오진 않았기에. 청춘의 오직 찬란함은 아직 먼 이야기, 먼 당신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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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연들 속에서도 그러나 꽃은 핀다, 동아리 방 작은 귀퉁이에서. 아마 다시 오진 않을 이 개화는 다만 너와 나의 약속과 의무가 적던 아직의 그 밤, 우연처럼 피오르는 것. 그냥, 너와 내가 만나서 생겨나는 까마득한 일들이다. 만나고 뭇 밤을 지새고 술을 한잔 하다간 무심코 털어놓은 양, 사실은 오래 묵은 각자의 사연들을 게워내면, 다음 날 아침에 조금씩 자라나는 그 꽃, 그냥, 애틋했던 우정들 말이다.

 

나는 시공간의 축을 따라 내 허적이던 그 밤들마다 뿌려놓은, 추억의 씨앗들을 거슬러 밟아본다. 주마등처럼 활동사진처럼 영사되는 나의 추억과 사연 속에는, 한때 친했던 이들과 이제는 보기 어려운 이들과 내 너무도 사랑했던 이와 내 동경하던 이와 내 버거웠던 이, 시기했던 이, 미워했던 이, 두려워하던 이와 고통스러워하던 이가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그래, 극은 그냥 대학생들의 동아리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에서 자꾸만 나를 떠올린다. 나의 동아리 활동은 비록 저들과 달라 슬프게만 끝나 버렸으나, 그럼에도 떠오른다. 만나고 가까워지고 MT를 가고 술을 한잔 하고, 갑자기 문득 어느 밤에는 각자의 사연을 게워내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말이다.

 

*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찬란함은 무엇이냐. 그것이 만약, 한 점 티끌도 없이 빛나는 것들에 대함이라면, 그것은 불가하기에 없어도 괜찮다고 말할법하다. 즉, 그것은 사실을 올곧이 비추는 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기쁨과 눈물로 얼룩진 가운데 피오르는 추억과 환희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것, 없어도 괜찮은 것들이 아니이다.

 

그래, 그 환희가 비루하고 소소하면서도 애틋한, 별 놀라울 일도 아니이고 SNS에 게시하여 자랑할 것도 하등 못 되는 나의 행복, 그리고 나의 슬픔이라면 나는 그것을 찬란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슬픈 봄을 지나 건너는 유일한 까닭일 때문이다. 또는 나로 하여금 이 시간의 강을 건너게끔 하는 하나의 부목, 꽃잎일 때문이다.

 

극이 말하는 찬란함은 무엇이었을까. 극의 제목이 말하는 찬란함은 티끌 없는 개화,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에 대함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환상이고, 전설이고, 하나의 왜곡된 신화이다. 한 인간이 온통 행복 속에서만 살고 자라고 피어나는 일이란, 내게는 전설같이 아득하기에. 물론 이 말이 모든 청춘과 모든 민들레에 부대끼는 시련과 바람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으나…… 주어진 바람은 각자 얼마간 다를 것이다만, 바람이 찬란함을 꺾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나는 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내 청춘과 추억에 어리는 찬란함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게 그것은 홀로서도 빛나는 태양을 관망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검은 수면 위에 비치는 옅은 달을 굽어보는 일. 돌아보며 뭉클해 하는 일이고, 그때는 그랬지 하는 일이고, 참 어쩔 수 없었고나 애틋해 하는 일이다.

 

내 청춘의 찬란함은 추억과 사연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하냥 아름답다기보다는,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반추하며 느끼는 추억에 대한 찬란함은 그렇다. 그럼에도 그것은 내게 찬란하다. 그 역설이 곧, 하나의 삶이라고 나는 아렴풋 감각하는 까닭이다. 어떤 청춘에게 부는 바람은 때아닌 폭풍일 수도 있으리다. 견디고 버텨보기엔 가히 불가한 시련을, 운명처럼 겪고 있을 누군가, 그런 이에게 건네줄 말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런 이의 추억과 사연과 찬란함이 어떠해야 하노라고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럴 땐 참 어렵고도 다만 슬플 따름이다.

 

*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극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마친다. 저 한 마디에 곧 뒤잇는 암전, 이 한 마디를 위해 극은 90분을 달려온 것이다. 이상하지. 내 눈에는 그 연극 속의 일상이야말로 찬란하였는데. 누구에게 선보여도 당당할, 자체로 눈부신 삶이란 그 얼마나 될는지. 우리 대개 삶은 소소하고, 그닥 새로울 것 없으며, 느닷 슬프기도 하고, 그런 속에서 흘러 흘러만 간다.

 

이따금 환희로 살아간다고도, 누군가는 말하더라. 이러한 뭇 삶이 직접적인 의미에서 찬란함과 얼마나 먼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이미 겪어 아리다. 그러니 극은, 무대 위의 배우들과 그들이 연기한 캐릭터는 저 한 마디를 남기었다. 아마 그 의도란 찬란하지 않은 우리의 삶, 이 당연한 삶은 그것으로 괜찮다는 말을 건네어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괜찮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에. 그러나 이상하지. 나는 이 연극으로 일궈낸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그 자체로 어쩜 그리 찬란하게 느껴지던지.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찬란함이란 청춘의 속성으로 흔히 일컬어지다. 삶에 아직 약속과 의무가 적은 그때야말로, 온 자유를 힘껏 안아볼 수 있는 아마 마지막 시기이기에. 그러므로 이때 청춘의 찬란함이란 온 자유 자체이다. 그 자유는 선보일만한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그러니까 예컨대 대학생과 동아리와 MT와 연극과 학교축제와 술자리와 술게임과 우정과 밤 지샘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자유에마저 응당 사람의 슬픔은 깃들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가난과 누군가의 이별과 누군가 겪는 창작의 고뇌와 누군가 겪는 숱한 거절과 누군가의 면접 탈락과 누군가의 비극과 누군가의 가정환경 같은. 이렇듯, 청춘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그것은 그저 찬란함도 아니요, 그저 슬픔도 아니리다. 혹 누군가는 자신의 추억 안에 일절 찬란함도 없었으며, 오직 슬픔뿐이었다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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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청춘의 찬란함이란, 청춘에겐 좀체 느껴지지 않는 것. 아직 우리 청춘이 남았고, 또한 우리가 지금 각자 슬픔 속을 걷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율하고 있기에. 꽃이 지고야 봄인 줄 알았다는 그 말이란 이제 참 진부하게 들려오기도 하지만, 꽃 피는 때에 꽃은 개화를 이겨내느라 저 스스로를 바라볼 겨를이 없는 것. 지나고 나면 아아, 할 일이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한 마디를 뱉은 무대 위 주인공은 가난과 우울과 외로움과 슬픔을 겪어내며 봄을 건넜다. 그러다가 우연처럼 동아리에 들어 추억과 우정을 쌓았다. 그런 이에게 ‘네 삶은 사실 찬란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에게 ‘네 삶은 그래, 온 고통이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청춘을 지난 그 스스로만이, 나중에 여정을 굽어보며 아아, 너무도 괴로웠던 한편으로 아련하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뭇 청춘에 고하는 연극,

또 지나버린 청춘을 밝히는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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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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