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이름에게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글 입력 2020.07.1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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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내 이름을 들었을 때, 놀라면서도 주위를 둘러본다. 일종의 본능과도 같다. 본능에 합치되어 버릴 정도로 수없이 많이 들어서 몸 어딘가 새겨져 있을 것 같은 단어, 나의 이름이다. 참 재미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비슷한 발음의 소리가 흘러나오면, 누구도 아닐 걸 알면서도 고개를 바삐 놀린다.


낯선 곳에서 불리는 그것은 순식간에 나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흩어졌던 물방울들이 다시 한 데 모여 구름을 만들어내듯, 나의 형체를 돌려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확인하면 이내 흩어질 걸 알면서도.

여행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런 것 같다. 이름의 쓰임새는 출입국관리소나 숙박시설에 체크인하기 위한 것이다. 잠시,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며칠동안 시간을 보내게 되는 ‘누군가’(헤어지고 나면 이내 잊어버릴 이름)와 대화에서 ‘야’라는 호칭을 대신할 뿐이다. 마치 인간4에 붙여진 무작위의 소리조합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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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가명을 쓸 때도 있었다. 한국인은 대개 새로운 언어를 접하게 되면 그 문화에 상응하는 이름을 골라보곤 한다(요즘 추세는 언어권이 어디든 본명을 쓰긴 한다만). 처음과 다르게 이름의 선택권을 갖는 재미다. 생소한 언어를 이용한 생소한 이름은 입에도, 귀에도, 내 몸에도 잘 달라붙지 않는다.
 
잠시 쓰고 버릴 이름들에 담긴 의미는 잠시 본명의 의식을 저 뒤편에 넘겨 둘 수 있도록 해준다는 건데, 그 중에서도 내 몸과 붙는 시간이 많아지는 이름은 이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본명의 기능을 갖추어 가는 것이다.
 
선택된 이름은 나를 순식간에 캐릭터로 만든다. 내가 이 몸을 조종하고 있으니 ‘나’임에는 틀림없다. 나만 아는 짧은 시간 거짓말의 짜릿함과 곧 헤어질 것이라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에 대한 비교적 무관심함이 한 데 섞여 이인감을 조성한다.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름은 나를 설립하는 동시에 나에게 의무감을 주는 무엇이므로. ‘아름답고 현명하다.’라는 고운 뜻이 싫었다. 조금 더 거칠게 모험을 하고 싶었던 나에게 얌전하고 평범한 이름말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주체적으로 이름을 새로이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쉬이 결정하지 못했고, 스페인어 학원에서 내 분위기와 잘 맞는다며 추천받은 이름은 달이라는 뜻의 루나(La luna)였다. 역시나 부드러운 어감의 ‘달’은 내 성을 채우지 못했지만 달리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달빛전사’는 내가 부여받았던 본명과 ‘나’라는 개체 사이의 매듭을 손에 쥔 무기로 쳐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메신저 알림음을 꺼 놓았던 나는 이제 ‘루나’가 되었으므로 한국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거리가 생겨 연락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
 
내가 완전한 ‘루나’가 되었느냐하면 잘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루나’를 조종하다가도 북적북적한 곳에서 나와 홀로 걸어가고 있노라면 ‘나’를 지칭하는 단어가 무엇이건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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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휴대용 손거울을 보면서 내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서서히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갔다. 루나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이 늘어갔다. 여전히 나는 마트에서 식료품을 구매했고, 안개 낀 호수 주변을 산책하곤 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 몸에는 다시 스티커가 불었다. ‘정육점의 고기 품질 등급 도장인가‘라고 속으로 혼자 낄낄 대던 순간에 그렇게 새겨져 있을 것만 같던 본명의 탈부착성이 비로소 인식되었다.
 
이름의 방향은 타자화 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것이나,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니,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던 긴 여행동안 나는 아무런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울을 보면서 곱씹어 보았던 때, 내 이름의 발음들이 혀와 이 사이를 부양하며 맴돌았던 것을 그제서야 느껴졌다.
 
이름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고나서부터는 내 이름으로 쓰이던 단어에 대한 감상평을 수집하고 다녔다. ‘나’ 이전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이전에도 만났던 누군가들에게 물었을 때, ‘나’는 알고 있던 내 본명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반해, 나의 본명을 ‘나’로 처음 접한 누군가들에게는 이렇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가 없다고 했다.
 
이름과 ‘나’의 관계는 단선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의 존재는 그리는데 30초도 걸리지 않는 선들의 토막보다 장황하다. 추상적인 개념을 압축시킨 언어라는 것이 이름이라는 것에는 예외였다.
 
어차피 내가 쓰지 않을 이름이다. 하고 많은 서류들에 지겹도록 내 이름을 써 나가고 있다. 서류를 받는 이들은 전체집합을 내 이름으로 규정하고 정보들을 집어넣을 테다. 모든 ‘나’에게는 다르다. ‘나’는 특징 그 자체이고, ‘나(self)’라는 전체 집합 안에 이름도 한 자리 차지한 것일 뿐. 그 비중이 좀 클 뿐.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426번쯤 들었을 때 이 무작위의 소리 조합에 ‘나’라는 향을 조금 나눠 주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나의 이름을 바꾸고 싶었던 그 때에는 이 단어말에 묻은 나의 향이 내 생각과는 달랐으리라. 나에게 향긋하지 않았으리라.
 
다시 돌아가서, 나의 이름에 나를 새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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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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