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철학을 담은 일러스트,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전시]

볼로냐에서 등장한 이색적인 일러스트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글 입력 2020.04.1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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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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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의 도시. 세상에서 가장 긴 회랑을 간직한 도시. 비를 맞지 않고 볼로냐 구시가지를 거의 다 둘러볼 수 있는 세계 최장의 회랑은 그 옛날 볼로냐대학 학생들의 부족함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붉은 도시. 붉은 벽돌 건물들이 도시 전체에 산재해 있는 도시. 볼로냐는 레지스탕스의 도시기도 하다. 시청 건물 벽에는 독재자 무솔리니와의 싸움에 목숨을 던졌던 모든 시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겨서 추모하는 도시.
 
부유한 도시. 시민 대부분이 협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협동조합 coop의 도시이며, 조합은 지역 경제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1인당 소득이 4만 유로가 넘어 이탈리아 전체의 2배가 넘고 실업률은 3%인 덕분에 유럽연합 전체에서 5대 고소득 도시에 속한다.
 
음악의 도시. 볼로냐 시는 2006년 5월 26일 ‘클래식부터 전자, 재즈, 포크, 오페라까지 다양한 장르를 발전시킴으로써 시민들에게 음악적 활력을 제공했다’는 업적으로 유네스코 ‘음악의 도시’로 선정됐다.
 
볼로냐는 이탈리아 도시 중 최초로 시 의회가 설립됐으며 1256년 리베르 파라디수스법으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노예제를 폐지한 도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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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력적인 도시는 거리 골목 하나하나마다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스토리를 담고 있다. 도시 자체가 살아 숨 쉬는 콘텐츠다. 자본이 모이는 곳, 투쟁의 역사, 가장 오래된 학문의 전당, 다양한 장르의 음악, 훌륭한 음식. 온갖 요소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한다. 열정을 도시화한다면 볼로냐일까? 볼로냐는 사그라들지 않는 활력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매력적인 꽃을 찾아 달려드는 벌과 나비처럼 예술가들도 몰려들었을 것이다.
 
이 도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을 50여 년 동안 개최해왔다. 볼로냐는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기회의 땅이 됐을 테다. 역사를 비롯해 규모마저도 어마 무시하다.  80개국에서 출품한 3000여 명의 아티스트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으며 2019년에는 76명의 작가가 창작한 300여 점의 작품이 선정됐다고 한다. 이 욕심 많은 도시는, 세계 각지 젊고 재능 있는 아티스트마저 품으려고 한다.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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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귀여운 일러스트에 눈이 확 갔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다양함이었다. 나열되어 있는, 300여 개 작품 수에서부터 아득했다. 6개 섹션으로 구분해두긴 했지만 워낙 작품 수가 많다 보니 정신없이 따라가 본 게 고작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작가마다 특색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종이를 다시 덧대거나, 영상을 같이 첨부하거나, 천에 바느질하거나, 현대적인 그래픽 아트로, 실제로 털실 캐릭터를 만들어 사진으로 남기는 등 기법을 헤아린 것마저도 저 정도다.

콘텐츠는 말할 것도 없다. 휘둥그레 떠진, 눈은 눈 돌아가는 정도의 형형색색 일러스트를 보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맨 처음 나눠줬던 "스탬프 투어", 이런 이벤트를 무척 좋아는 내가 엉뚱한 곳에 스탬프를 찍기 일쑤였을 정도로 몰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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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명의 작가와, 그에 비롯되는 300여 점 작품은 다시 말하자면, 최소한 저마다 76개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온갖, 범람하는 가상 세계들 사이로 이리저리 부유하고 휩쓸린 느낌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일러스트는 나고 자란 고향, 토속적인 지역 특색과 문화,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거나 국적 상관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눈을 사로잡기도 했다.
 
 
 
동화와 신화와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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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time. 옛날 옛날에. 신화와 동화에서 가장 처음 시작되는 말로 흔히 사용된다. 다음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청자는 물론 화자가 태어나기도 아득하게도 전에 생긴, 화자가 청자의 역할이 무수하게 바뀌고 반복됐던 이야기다. 몇 마디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부모와 자식, 조상과 후손, 그들 간의 연대를 형성해낸다.
 
아주 예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발화될 때마다 좀 더 매끄럽게 보완되고 흥미를 덧대는 등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올린 전 신체다. 인류가 본능적으로 일궈낸 무형 문화인 셈이다. 과장하면 인류가 쌓아올린 생활습관의 빅데이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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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손톱을 먹은 들쥐>에 대해 잘 알 것이다. 말 그대로 손톱을 먹은 들쥐가 주인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뭘까? 손톱을 잘 깎고 버리지 말라는 말은, 위생상태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현재로선 당연하게 지켜졌던 위생 상태가 당시에는 당연한 것이 아닐 터였다. 더불어 현재의 의료시스템에 비해서 한참이나 낙후된 의료시스템이니 당연히 치료보단 예방에 조명했을 것이다.
 
이처럼 동화와 신화에는 조상들의 연륜이 녹아내려있다. 상기한 동화는 위생에 더불어 효, 근면 성실, 권선징악 등 오늘날에서도 통용되는 보편가치가 몇 단락 안되는 이야기에서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가치는 물론, 동화와 신화는 비슷한 흐름, 주인공, 사건 등 어디서 본 듯한 구조로 정형화되어있다. 상황에 맞춰 주인공과 교훈이 달라질 뿐이었다. 이는 수용자 입장에서 소재가 달라지더라도 친숙하게 수용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더불어 문자가 아니라 언어로 전해내려왔다는 점에서도 가장 쉽게 보편 가치와 상식, 규칙 등이 전승되는 생활규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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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섹션이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인류가 쌓아올린 문화유산이 문자가 아니라 시각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시각 이미지는 우리에게 가장 빠르고 쉽게 수용되며 입력될 수 있는 매개체다. 발달하는 과학 기술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됐던 이야기도 새로운 방식으로 생존을 꾀하고 연장된다는 의미가 있다.
 
더군다나 문화 총체의 수용자는 아동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인류가 쌓아올린 거대한 문화유산과 가치를 시각적 이미지, 단 몇 개의 일러스트로 계승할 수 있다는 데서 아주 매력적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편 가치를 읊는 건 잔소리지만, 동화와 신화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건 자식과 놀아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일러스트로 아이와 놀면서 거부감 없이 보편 가치를 계승할 수 있다.
 
더불어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참여한다. 참가자들이 다른 작품을 살피며 서로 영향을 받는다는 건 당연한 얘기다. 인류가 말하고자 하는 보편 가치는 어느 정도 통용되는 경향이 있다.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인류가 쌓아올린 빅데이터는 좀 더 현대적이며 보편적 가치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그 자체는, 동화, 신화를 콘텐츠로 일러스트를 매개로 새로운 문화가치로 전승되는 과정 아닐까?
 
 
 
심사위원과의 질의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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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목할 점이 있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심사위원과의 질의응답이다. 그 많은 작품이 어떻게 추려지고 선정됐는지 알려주는 지표다. 자칫 모르고 지나갈 뻔했으면 아쉬웠을 정도로, 작품의 매력을 한층 더 깊게 향유할 수 있는 장치였다. 그 덕에 더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Q : 개인적으로, 일러스트레이터 전시에 선정될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  … 이미지가 '열려 있는지' 여부입니다. 독자가 그림에 몰입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는지, 이미지가 보는 이를 자극하여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하게 하는지 등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유머를 담고 있냐는 것입니다. …

 
굉장히 공감했다. 나름 작품을 향유하는 데 기준이 있다. 주관적으로 재밌다고 느껴지는 작품은 어렵고 난해했다. 그러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잔상이 남게끔, 길게 여운을 끌게끔 만들어버린다.

내가 모르는 어떤 상징과 의미가 있는지,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 삶을 어떻게 작품에 녹여냈는지. 그 작품에서만 드러나는 개성과 독특함이 무언지. 나름대로 해석하고 찾아보고 하는 과정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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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험을 주는 작품은 아주 재밌는 작품이다. 전시장을 떠나고 집에 와서도 작품에 몰두해있는 건, 감상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한 번은 작가 혹 전시 제작자가 의도한 공간에서 감상해보고, 다른 한 번은 사적인 공간에서 나름 곱씹게 되는 경험이다. 작품에 '유머'가 담겨있어야 하는 심사위원의 답변이 마치 평소 "재미"로 여겨왔던 작품 감상처럼 들렸다. 독자들이 몰입하고 상상할 수 있는 '유머'가 담겼는지 말이다.
 

Q : 아동을 위한 그림책은 죽음, 질병, 사망 또는 전쟁 등 어려운 주제 들에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하나요?

A : 왜 우리는 어린이들과 대화할 때 특정한 주제를 배제해야 하나요? 무엇 때문인가요? 성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아동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피해를 입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내재화하지 않은 것은 우리 어른들의 편견입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넓은 범위의 가능성을 제시하도록 합니다.

 
심사위원의 이러한 가치는, 이번 볼로냐 전시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일러스트에서는 흔히 흑백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밝고 따뜻한 색감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볼로냐 일러스트에서는 종종 흑백 일러스트가 등장한다. 때로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건지 모를 정도로 기괴한 일러스트마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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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을 대상으로 한 일러스트인데 너무 적나라하고 그로테스크한 게 아닐까? 처음에는, 이상했다.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은 심사위원의 답변을 보고 알았다. 분홍, 초록, 노랑. 자체로 보호, 안정, 편안함, 따뜻함을 상징하는 색 들이다. 따뜻한 색감의 일러스트는 흔하다. 그러나 볼로냐에서 등장한 이색적인 일러스트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아동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던 낡은 관념을 탈피했다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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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람하는 미디어 세계.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손쉽게 가상세계에 접근해서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를 누릴 수 있다. 아동이라고는 그러지 못할까? 오히려 쏟아지는 신문물에 어색해하는 우리보다 더 빠르고 쉽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단순히 어려운 주제라며 통제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비록 어려운 주제라도 아동에게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보호한다는 건 아동을 존중하고 아동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한다는 말이다. 단순히 정보를 막고 통제하려 든다면, 아이의 유년시절을 방에 가두고 키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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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우리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성인이며 동반자가 될 테다. 아이들이 그런 동반자로 자랄 때까지, 아동 스스로 가치관을 세울 수 있게 선택지를 주고 자립심을 독려하는 것까지만 우리가 할 일이다.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일러스트에 어려운 주제를 담음으로써 아동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독려한다.
 
 
 
일러스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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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전시에 입장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어떤 일러스트가 쏟아져 나왔고 어떤 특이한 디자인이 있었는지에만 궁금했다. 일러스트 그 자체를 표지, 하나의 작업물 정도로 여겼던 편협한 생각이었다. 물론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흥미로운 소재, 귀여운 캐릭터를 보여줬다. 그에 뒤따르는 철학과 콘셉트는 일러스트 자체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줬던 값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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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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