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장벽의 시대에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 책 '장벽의 시대'

해답이 없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반복되어서는 안 될, 묵인되어서는 안 될 폭력은 분명 존재한다.
글 입력 2020.04.1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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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생 저널에서 활동했을 때 나는 국제 팀 소속이었다. 매달 각자 기사를 기고하는 것은 공통 사항이었고, 국제 팀은 고등학교 학생들의 외신 번역을 돕는 멘토링 활동을 겸했다. 저널 특성상 환경 관련 기사들을 주로 번역했는데, 간혹 정치나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들도 있었다.


그 당시 외신 기사들을 자주 접하면서 세계가 참 다른 듯 비슷하다고 느꼈다. 한국에서는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세계 곳곳에서는 국제기구 내 성폭력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돼왔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아동 성폭력 범죄가 조혼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여전히 빈발하고 있다는 탐사 보도가 나왔다. 유사한 문제가 비슷하게 반복되어 일어났고, 현실은 잔혹했다.

 


“있던 것이 있게 될 것이며, 행해진 것이 행해질 것이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전도서Ecclesiastes》 1장 9-10절)


 

팀 마샬의 책 『장벽의 시대』 마지막 장에 인용된 문장이 떠오른다. 매일 새로운 뉴스가 올라오고, 한 사건이 희미해질 때 즈음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 그것이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다.

 

세계 곳곳에 세워진 장벽의 문제도 그러하다. 디스토피아 소설에 나올 법한, 중국의 위구르족이 겪는 심각한 인권 침해의 문제는 미얀마의 로힝야족이 겪는 집단학살·성폭력 문제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듯하지만, 소수민족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국가 기관에서 저지른 폭력이라는 점에서 같다. 국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다양한 부족-민족들 간의 충돌과 시아파, 수니파로 분열된 중동 지역의 갈등 모두 역사적으로 발생한 식민주의와 오랜 세월 굳어져 온 관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저자는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내전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들이 “스스로 식민주의의 영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을 때까지”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사가 남긴 상흔이 회복되기까지는 60~70년의 세월도 충분하지 않다는 저자의 말은 더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역사가 우리에게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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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나는 장벽이라는 표현을 장애물, 울타리, 그리고 모든 다양한 분리에 대한 약칭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각 장에서 대부분 벽돌과 모르타르, 또는 콘크리트와 철사로 이루어진 물리적인 장벽들을 보게 될 것인데, 그것들은 분리의 ‘이유’가 아니라 분리의 ‘결과’이며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장벽의 시대』 p.15)


 

물리적 장벽은 기본적으로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 서독과 동독 사이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과 유럽을 양분하는 철의 장막은 동유럽 사람들의 이주를 막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졌으며, 인도 곳곳에 세워진 장벽들 또한 이주민들의 급증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다. 또 갈등 상황에 놓인 두 국가 간의 장벽은 군사적 공격이나 테러를 막겠다는 뚜렷한 명분 하에 세워진다.

 

그러나 장벽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관리할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장벽은 분리가 행해진 결과로 세워졌고, 장벽이 대변하는 분리와 배제의 정치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세워졌었고, 지금 세워진, 또 앞으로 세워질 물리적 장벽들은 비가시적 장벽들을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두려움과 적대감을 키우고, 그 감정은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를 가르는 ‘분리장벽(separation barrier)’에 있는 "이 벽은 현재를 돌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런 미래도 없다"는 문장은 하나의 대응책으로서 장벽이 갖는 한계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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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은 사람을 병들게 하기도, 죽게 하기도 한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졌을 때 이동의 자유를 제한당한 동독 사람 중 일부는 “스스로 감옥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 증후군을 겪었고, 이는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 ‘장벽병(Mauerkrankheit)’이라는 용어로 정의되었다. ‘장벽병’은 “조현병, 알코올 중독, 우울장애, 심지어 자살 같은 심리적-행동적 장애를 불러 일으켰”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에는 삼엄한 감시를 받는 장벽이 있고, 국경 경비병들은 그 울타리를 넘으려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사살했다. 2011년에는 가족들과 국경을 넘으려고 했던 열다섯 살의 펠라니 카툰이 총격에 의해 울타리에 매달린 채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장벽에서 발생하는 폭력 사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으나, 이후 그 어떤 변화로도 이어지지 않았고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이것은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경 보안이 증가한 탓에 2016년은 국경에서의 사망(전 세계적으로 7,200명) 기록을 세웠다”고 리스 존스 박사는 지적한다.

 

이렇듯 어떤 장벽도 그 존재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누구도 장벽의 문제에 대해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각각의 장벽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로 결론 내려질 수 없다. 우리가 그곳에 있지 않기에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분명 그곳에 존재하고, 사람들이 느끼는 위협의 그 ‘실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장벽은 사라져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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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분리장벽에 그려진

뱅크시의 그래피티



그리고 정치의 바깥에, 어쩌면 경계선 어딘가에 예술이 존재한다. 책에는 영국의 선전 예술가 뱅크시(Banksy)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경에 세워진 분리 장벽의 팔레스타인 쪽 구역에서 몇 년 간 벽화를 그려왔고, 2017년에는 ‘벽으로 분할된 호텔(Walled Off Hotel)’을 열었다. 그의 그림에는 장벽과 분쟁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담겨 있고, '벽으로 분할된 호텔'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장벽과 일상의 병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대변한다.

 

또 분리 장벽의 여러 구역에서는 맨발의 열 살 난민 소년 한잘라(Handala)의 모습이 발견된다. 팔레스타인 예술가 나지 알-알리(Naji al-Ali)가 만든 캐릭터 한잘라는 그가 그린 시사만평에 등장해 팔레스타인 내에서 발생한 폭력과 그에 대한 저항을 전했고,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장벽에 그려진 한잘라의 뒷모습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정의가 존재해야 비로소 몸을 돌리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며 그는 “보통 우리를 등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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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칼리드 알-알리

 


"한잘라는 가난하고 못생겼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광경을 지켜본다. 단지 아랍 세계만이 아니라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목격한다. 그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그는 순진하다. 어린 아이는 어떤 거리낌도 없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발언할 수 있다. 한잘라는 바로 그렇게, 뒷일을 고려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그대로 말해버리는 존재다. 그는 두려움 없이 정의를 말할 수 있다."

(김용언 기자, 〈런던에서 암살당한 만화가. 누가, 왜 그를 쐈는가 - 칼리드 알 알리 인터뷰〉, 《프레시안》, 2014.06.11)


 

해답이 없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반복되어서는 안 될, 묵인되어서는 안 될 폭력은 분명 존재한다. 어느 시대에나 정의를 말하는 목소리는 있어 왔고, 자신의 경험으로, 삶 전체로 빚어낸 그 말들은 우리에게 폭력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산발적인 목소리들는 어떤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분명 늦더라도 가야 할 길이, 우리에게는 있다.


 



[김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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