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트북 앞이면 캄캄해지는 당신에게 - 파인딩 포레스터 [영화]

글 입력 2020.04.1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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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앞에 앉아 빈 글을 들여다보는 일이 두려운 요즘이다. 백색의 화면 위로 막연한 공포가 내려앉으면 괜히 창밖을 내다보며 멍을 때리고, 키보드 위 가지런히 얹어진 손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고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로 노트북을 덮곤 한다.


쓰면 쓸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빈 글을 마주하는 매일이 초면이다. 여전히 낯을 가리고, 매번 적응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핑계를 대고 싶다. 슬럼프라 부르기엔 다른 차원의 감정, 어느 땐 자의식 과잉 같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불신감에 잠시 휘둘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복합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레 겁을 먹고 노트북을 덮었던 어느 밤, 답답함에 뭐라도 해보자며 틀어본 영화가 바로 <파인딩 포레스터(Finding Forrester)>다. 이 영화를 알게 된 건 대학교에 입학했던 해에 수강했던 어느 전공 수업에서였다.


그래 봤자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까마득한 시절처럼 여겨졌으며, 영화에 대한 기억 대신 멋쩍게 웃으시던 교수님의 한 마디가 생생했다. ‘쉽지 않고요, 너무 지루해요. 하지만 글을 쓰는 데 여러분의 멘토가 되어줄 수 있는 영화예요.’ 그리고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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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딩 포레스터>는 개봉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꽤 오래된 영화다. <아이다호>, <굿 윌 헌팅> 등의 영화를 제작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작품으로, 감독의 전작인 <굿 윌 헌팅>과 함께 스승과 제자의 진한 우정을 다룬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과거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렸지만 한 권의 책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고 은둔 생활을 하는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와 농구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 자말 월리스, 이 두 인물의 이야기다.


창문으로 몰래 밖을 내다보기만 하며 은둔 생활을 하는 포레스터는 동네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미스테리한 ‘창문씨'로 불린다. 그리고 자말은 친구들과의 내기를 통해 창문씨의 집에 몰래 침입하여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임무를 맡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말은 실수로 자신의 창작노트 몇 권을 포레스터의 집에 두고 나온다. 그리고 며칠 뒤 자말은 그로부터 의문의 피드백이 적힌 자신의 창작노트를 돌려받는다. 그러한 계기로 교류를 시작하게 된 포레스터와 자말은 문학과 글을 통해 우정을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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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말은 뉴욕 브롱스의 빈민가 출신이며, 또 흑인 소년이다. 그는 우연한 시험을 통해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명문 사립학교로부터 전학 제의를 받는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브롱스 출신에 흑인인 학생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가정하에 자말을 의심하는 교수,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받아야하는 이유 모를 따가운 눈초리. 그리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포레스터를 찾아갔지만, 그에게 듣게 된 어처구니없는 문장. ‘And you’re black. Remarkable.’


사실 이는 포레스터가 자말을 시험하기 위해 던진 문장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에게 돌아온 문장은 단번에 그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Remarkable, what?’. 덧붙여 흑인인 게 놀라운지, 그게 그리 중요한지 덧붙여 물을 수 있는 힘이 자말에게는 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뭐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거지. 우린 이해가 안 되면 가정을 한단다. 크로포드는 이해를 못해. 브롱스 출신의 흑인 아이인 네가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래서 못할 거라고 가정을 하는 거란다.”

 


이 영화의 첫머리에서 포레스터는 자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마디 표현이 천 마디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은 곧, 천 마디를 압축한 한 마디의 표현을 내뱉기까지 얼마나 오랜 고민과 노력이, 발화를 위한 용기가 필요한지에 대한 무거운 의미를 안고 날아와 꽂힌다. 본질을 담아내는 말, 본질이란 사실 뒤의 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대개 가시적인 것에 매몰되고, 그렇게 혼돈과 무질서로 세상을 모호하게 바라보고선 그 사실을 전부라고 믿기에 사실에 가려진 진실을 보는 일이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질서를 발견해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중요해진다.


‘당신을 본다’라는 문장의 ‘보다’라는 동사는 때때로 ‘see’ 너머의 의미를 지닐 때가 있다. 세상엔 다양한 깊이와 습도의 ‘보다’가 있다. ‘시각(視覺)’, ‘시야(視野)’와 같이 단순히 물리적인 행위로써의 ‘보다’를 뜻하는 한자 ‘볼 시()’ 자가 있고, ‘견해(見害)’, ‘편견(偏見)’처럼 눈으로 볼 수 없는 일종의 추상을 내다보려는 노력이 깃든 한자 ‘볼 견(見)’ 자가 있다. 그리고 그 끝엔, ‘주관(主觀)’, ‘관점(觀點)’, ‘가치관(價値觀)’, 인내를 통한 오랜 노력 끝에 본질을 꿰뚫는 눈, ‘볼 관(觀)' 자가 있다.


포레스터는 자말에게 ‘(시)’에서 ‘見(견)’으로, 또 ‘見(견)’에서 ‘觀(관)’으로 부단히 움직여야한다는 걸 가르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천 마디 가치가 담긴 한 마디란 집요한 ‘관찰(觀察)’과 탐구 뒤에야 쓸 수 있을 문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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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결국 쓰는 일이다. 글쓰기에 관한 몇 가지 팁들이라도 얻고자 재생했던 영화는 곧 노트북 앞에 나를 앉혀놓았다. 빈 글 앞에 두렵기만 했던 건 결국 ‘잘’ 써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뭐든 잘하려고만 하면 일을 망친다. 분명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심이나 책임을 다하려는 마음가짐이 잘못된 것은 아닌데, 나아가 맹목적으로 ‘잘’에 매달리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하는 듯하다. 잘 나아가다가도 금세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고 만다.

 


내가 알던 어떤 사람은 우리가 실패할까봐 또는 성공이 두려워 꿈에서 멀어진다고 했지. 네가 꿈을 이룰 거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나 자신의 꿈을 한 번 더 이루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계절은 변하지, 젊은이. 난 인생의 겨울이 지난 세월의 추억과 조우하는 것을 기다려오고 있었나 보다. 분명 내 기다림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을 것이다. 너의 도움이 없었다면 말이다.


- William Forrester

 

 

하지만 잘 쓰고 싶다는 말은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지나친 부담감과 뚱뚱하기만 했던 욕심의 눈으로 내가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좋은 글의 요건이란 멀리에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레스터가 강조했듯 인내를 거친 고뇌와 탐구로 쓰인 글이 좋은 글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가는 것처럼. 또 스승인 줄만 알았던 포레스터가 제자인 자말을 도우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한편으로는 그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살게 하는 글은 좋은 글로 나아간다.


창문의 바깥쪽을 닦을 때가 아니고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포레스터가, 자말의 손을 잡고 야구장에 갔고 다음엔 자말을 돕기 위해 스스로 직접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갔다. 포레스터와 자말이 보여주듯, 나를 ‘움직이게’하는 글은 느린 속도로라도 서서히 타인에게 가까워진다. 타인의 곁으로 다가간다.

 


“저녁으로 「타임스」를 읽고,

이건 디저트야.”

 

 

조금 덜 무거운 말들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잘’을 뺀 문장들. 그저 쓰고 싶다는 말. 잘 살고 싶다는 말은 그저 살아있자는 말. 글자는 가벼워졌지만, 오히려 더 절박해진 진심. 가벼운 말이 아닌 덜 무거운 말은 ‘잘’에 갇히지 않으면서 오늘과 내일 나는 왜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알려준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듯 술술 써내지는 못하지만, 머릿속에서 감각으로만 맴돌던 한 마디를 오랜 고민 끝에 문장으로 써냈을 때, 그 문장이 문단이 되고 문단이 마침내 하나의 글이 되었을 때, 다름이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오늘과 내일의 나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쓴다. 노트북 앞의 두려움과 공포를 일일이 걷어내며 더 나은 나에 대한 희망을 아주 조금씩 불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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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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