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두를 위한 예술 [영화]

다수를 소수로 만드는 영화
글 입력 2020.03.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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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예술’ 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 예술들이 과연 말 그대로 ‘모두’를 위했는가? 예술은 결국 ‘다수’를 위한 것에 멈춰있다. 사회 취약계층의 사람들은 영화관, 전시회, 뮤지컬 등을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또한, 장애가 있는 사람을 위한 시설은 아직까지도 미비하다. 예시로 장애인분을 위한 영화관의 자리는 단 한자리, 그것도 사람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맨 앞자리 혹은 맨 뒷자리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예술이 모두를 위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저 편하게 예술을 보는 다수의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것 같다고 현실을 보지 않고서 말한 것이 아닌가. 우리의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수를 위한 예술만이 아닌 소수를 위한 예술이 존재해야 한다. 소수를 넘어 진정한 의미의 ‘모두를 위한 예술’을 향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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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동안 소수가 겪은 피해에 대해서 고발했다. LGBT 혐오에 대해서 저항하는 ‘120 BPM’ ‘밀크’ 등과 같은 이야기가 있고, 사회 빈곤층을 대변하는 ‘아이엠다니엘브레이트’란 작품도 있다. 이렇듯 영화는 저항의 이야기를 가지고 온다. 장애인 인식 개선에 대한 영화들도 많다. ‘아이엠 셈’ ‘미라클 벨기에’ 등의 영화들은 우리의 생각의 폭을 넓히고, 반성하게 한다. 하지만 그 동안 그 영화들은 생각의 변화는 가지고 와도, 행동의 변화는 가지고 오지 못했다.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은 적어도 해외 영화를 볼 때는 자막이 있어서, 어느 정도 영화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로 영화가 나올 때는 모두가 한국어를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진행하여 한국어 자막이 있는 영화관이 전무하다. 현재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그 세계적인 부분에서 다시 소수는 외면 받았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행동이 변화해야만 한다. 예술을 통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다수는 더 많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

 

 

 

영화 '트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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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관객을 순식간에 소수로 만드는 영화가 있다. 바로 영화 ‘트라이브(The Tribe)’란 작품이다. 미로슬라브 슬라보슈비츠키(Myroslav Slaboshpytskiy) 감독의 작품으로, 이 영화가 개봉된 2014년 영화계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영화가 나왔으며, 당시 해외 언론과 영화계 종사자들은 이 영화를 올해의 가장 독창적이며 파워풀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 평가에 걸맞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트라이브’는 세르게이가 농아특수학교로 입학하게 되고, 그 안을 장악하는 집단과 만남을 다룬다. 농아특수학교에 대한 이야기니, 주인공은 수화로 소통한다. 하지만 감독은 그 말을 관객에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이 그들의 표정과 동작을 보고서 그들이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짐작할 뿐이다. (물론 영화적인 연출이 뛰어나서 영화의 초반만 참는다면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

 

듣고, 보는 것이 익숙했던 관객들은 그들의 대화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화적으로 좋은 작품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대사가 하나도 없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적을 것이다. 과거 무성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무성 영화는 장면으로 그 대사들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트라이브’는 농아특수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직접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 대화 속에서 관객은 완전히 단절된다. 무성영화보다 이 영화로 인한 답답함이 더욱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연출은 다수의 사람이 바로 순식간에 소수가 된다. 관객은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들의 행동과 표정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한다.


그동안 만들어진 영화는 복잡한 영화가 아니라면 중간에 고민에 빠져서 생각에 잠기더라도 영화의 결말을 보는 데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불편함을 감수해서 계속해서 영화를 봐야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불편함이 우리가 소수라고 그동안 배려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계속된 질문,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는 영화 트라이브로 다른 체험을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모두가 익숙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모두에게 옳은 예술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잊지 않게 되었다. 그런 노력이 기회까지도 나아가야 한다. 영화, 음악, 미술 등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무언가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단절된 공간 속에서 사는 이들도 있다.

 

예술을 알면 변화할 수 있고, 예술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기로 한다. 진정한 의미의 예술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모두라는 단어에 다수가 아닌 소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소수의 범위는 넓으며 순간에 다수에 속했던 우리들도 그 순간에 소수에 속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향유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 노력과 기회의 끝 우리는 모두가 진정한 예술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박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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