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동네의 분위기 - 후암동이 매력적인 이유 [문화 공간]

글 입력 2020.03.07 08: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어린 시절, 학교가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달려갔던 문방구와 만화방, 골목길 모퉁이를 돌면서 느꼈던 세탁소집 라디오 소리, 집 앞 정자에 모여 계시던 동네 할머니들. 나에게 기억되는 동네의 모습은 어린 시절의 순간에 멈춰져 있다. 그때 지내던 동네가 재개발로 인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바뀌게 되면서 기억 속 동네의 모습도 함께 사라져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동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높은 아파트와 상가 단지로 둘러싸여버린 지금의 동네에는 왠지 '동네'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동네.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여러 집이 모여 있는 곳'이다. 여기서 '집'이란 단지 한 가정이 머무는 개별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카페, 식당, 서점, 미용실, 교회 등 우리의 다양한 생활을 담아내는 공간들은 모두 각자의 목적에 의해 지어진 '집'이 된다. 그렇게 동네는 주민들의 여러 생활상을 담는 다양한 집의 집합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각각의 집들이 아파트 상가주택 속으로 편입되고 프랜차이즈 업체로 대체되면서 집으로서의 역할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꾸미기]1.jpg

©@tomchill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의 많은 동네들은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의 분위기를 상실하고 있다. 작은 주택들이 높은 아파트 건물로 변신함과 동시에 동네는 더 이상 집들의 집합소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저 내가 머무는 집이 속한 지리적 단위로서, 그 의미가 상당히 고립적인 형태로 축소되는 것이다. 동네의 경계선이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된 지금, 우리는 어쩌면 함께 사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외따로 살아가는 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동네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에 애정을 느낀다. 평범하지만 사람들의 정겨움과 따뜻함이 매력적인 곳. 여기, 어쩌면 서울에서 가장 동네 다운 동네가 있다. 바로 남산 아래 자락에 위치해 있는 후암동이다. 이곳에 가면 키가 낮고 낡은 주택들과 함께 골목길 사이사이 독특한 분위기의 공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후암동이 특별한 이유는 자신들만의 동네를 만들어가는 동네 건축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집의 범위를 동네로 확장시켜보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도시공감협동조합'의 <후암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가장 평범한 동네를 그 어디보다 특별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꾸미기]5b2391f0f0c14.jpg

©도시공감협동조합

 



동네를 만드는 사람들


 

'도시공감협동조합'은 2014년 도시재생 분야로 시작된 건축사 사무소이다. 재건축과 재개발 사업에 의해 무참히 사라져가는 오래된 동네의 흔적을 지켜내고자 시작한 <후암 프로젝트>. 이들은 도시재생을 위해서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고, 주민들 간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된 동네의 역사를 기록하고 주민들의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를 위해 '도시공감협동조합'은 현재 마을 아카이빙과 동네 공유 공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꾸미기][크기변환]dd760b01a2cb5.jpg

©도시공감협동조합

 

 

<후암가록>, 집과 삶을 기록하다


마을 아카이빙 프로젝트인 <후암가(家)록>은 후암동 일대에 20년 이상 존재한 오래된 집들에 관한 기록이다. 신축 건물이 들어서며 기존의 건물들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기록을 시작했다. 집주인이나 거주자의 신청을 통해 아카이빙 작업이 이뤄지는데, 주로 집을 도면화하고 이미지 작업을 통해 동네 홍보물과 기록물로 남긴다.


오래된 집의 역사를 기록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곳에 사람들의 애정과 삶의 의미가 깃들게 된다. 집이 거주자의 삶과 역사를 함께 반영하기 때문이다. 관련 결과물들은 후암가록 공유 공간에서 전시 중이니 누구나 이 동네의 소소한 역사를 음미해볼 수 있다.



[꾸미기][크기변환]아는동네.jpg

©iknowhere.co.kr

 

 

<후암주방>, 밥은 먹고 다니냐?


<후암 프로젝트>에서는 현재 후암 주방, 후암 거실, 후암 서재 총 세 곳을 공유 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5분 거리 내에 세 공간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동네 자체가 하나의 집이 되고 있다. 일정한 비용을 내고 신청을 하면 공간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설계된 후암 주방은 바깥에서 바라만 봐도 따뜻한 집 밥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물어볼 여유가 없는 때가 되어버렸다. 좁은 원룸에서 사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후암 주방은 3평 남짓한 공간으로 가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소박한 밥 한 끼 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근처에는 후암시장이 위치해 있어 간편하게 재료를 구매해 동네 친구들과도 소소한 일상을 즐길 수 있다.

 

 

[꾸미기][크기변환]17098012_1076192642484781_3859843861903870913_o.jpg

©도시공감협동조합



<후암서재>, 나만의 작은 서재


후암 서재는 나이와 상관없이 동네 주민들의 이용 비율이 특히 높은 공간이다. 벽면에 위치한 목재 선반과 나란히 놓인 책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이곳은 주로 작업실로 사용되거나 독서 모임, 취미 클래스 등 소규모 모임이 이루어진다. 매일 다니던 시끄러운 카페나 서점에 지쳤다면, 가끔은 조용히 잠시 머물러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기 좋은 장소다. 낮과 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는 것도 이 공간이 가지는 매력이다.



[꾸미기][크기변환]unnamed.jpg

©iknowhere.co.kr


 

<후암거실>, 우리 집에 놀러와


친구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렇다고 남의 집에 초대받는 일도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후암 거실에서는 마치 이웃집에 놀러 간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내 집에 다른 사람을 초대한 듯 파티를 열 수 있는 공간이다. 넓은 소파와 영상 기기만 있으면 친구들과 근사한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하다. 생일 파티나 독서 모임을 가지기도 하고 영화관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비록 잠시 빌려서 머무는 곳이지만 내 집인 듯 편안한 마음으로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꾸미기][크기변환]다운로드.jpg

©@blankin


 

네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공유의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있다. 이렇듯 동네에 함께하는 공간이 생기는 것을 가장 즐거워할 사람은 바로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다. 집의 역할과 영역이 제한받는 요즘, 공간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 주는 <후암 프로젝트>가 고맙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자신이 머무는 동네가 또 다른 집으로서 인식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네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고급스러운 카페도, 줄 서서 먹는 맛집도, 꼭 가야 하는 핫플레이스도 아니다. 어딘가 엉성하고 빈약해 보이지만 실제 동네 생활자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꽉 찬 곳이 바로 그 동네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곳에는 서로를 대하는 낯설면서도 반가운,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얼굴들이 존재한다. 동네라는 껍데기를 함께 만든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음미하게 될 때, 비로소 그곳이 우리에게 '동네'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김지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