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 프라하로 딴짓하러 오세요 ③

글 입력 2019.12.0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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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짓 Episode.03

Nápoje l Kava

 

 


원래 주제는 낮에는 티타임, 밤에는 맥주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체코에서 가장 많이 마셨던 건 '커피'고, 가장 많이 했던 일이 '카페 찾아다니기'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엔 프라하의 커피와 카페들을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 Afternoon in Prag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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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이 한창일 때 체코에 있었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하늘이 조금 많이 흐렸습니다.

 

구름이 조금 떠있는 수준이 아니라 두터운 솜이불이 하늘을 덮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언젠가 걷히기는 할까 싶은 구름 아래를 걷고 있으면 괜히 막막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날이 너무 흐리고 우중충하니 저까지 물먹은 솜처럼 축축 쳐지더라구요. 식물도 아니면서 햇빛과 바람에 왜 그리 예민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어둑어둑하고 과묵한 프라하의 오후를 저는 끊임없이 커피를 마시며 보냈습니다. 주말에 움직이기 귀찮을 땐 Karlin이라는 동네에 자주 갔습니다. 집이랑 가까운데다 로컬들 사이에서 핫플레이스라 비교적 한산했거든요. 감각적인 레스토랑과 카페도 많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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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ft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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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ft Cafe

 

 

한 번은 새싹처럼 환한 연둣빛 카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프라하의 어둡고 칙칙한 공기 속에 연두색이 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카페에 들어서자 주인은 신기한 눈으로 저를 다정하게 바라봤습니다. 그 동네에서 동양인은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그 분은 저를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제게 프라하에 오래 머무를 계획이냐고 물었습니다. 반 년 정도 있을 예정이라고 답하니, 명함 크기의 작은 종이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프라하에 있는 카페들끼리 진행하는 이벤트인데, 종이에 적힌 카페들에 가서 도장을 모아 응모를 하면 추첨으로 선물을 줘요. 프라하에 있는 동안 한 번 모아보세요!"

 


신이 났습니다. 그게 당첨 복권도 아니고, 돈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저는 직감적으로, 그 종이가 곧 멋진 시간과 추억이 되리라는 걸 알았어요.

 

 

 

[ Kava in Kavarna l Coffee in Cafe ]

 

 

한가로운 주말이면 그 종이에 적힌 카페를 찾아 다녔습니다. 현지인들 눈에도 잘 띄지 않을 법한 좁은 골목을 들쑤시고 다녔어요. 그렇게나 많이 걸었는데도 여전히 처음 보는 길을 종종 마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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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varna Cekar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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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varna Cekarna

 

 

한 카페는 도저히 가게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공간에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아있으면 마치 어미새 품에 안긴 참새가 된 기분이 들었어요. 한 면이 통유리로 된 그곳에 가만히 앉아 프라하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조용히 배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카페 주인 남녀는 틈틈이 서로에게 안기고, 기대고, 키스를 했습니다. 애써 모르는 척 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들은 사랑을 나누었고, 저는 커피를 마셨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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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shot Coff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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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shot Coffee

 

 

어떤 카페는 손님이 너무 없어서 망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습니다. 주인장과 둘이 멀거니 창 밖을 바라보며 내가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면 어쩌나 싶어 괜시리 조바심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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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ll Coffee

 

 

어떤 카페는 벽을 트고 미용실과 바로 옆으로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서로의 향이 진한 탓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만들며 자신의 공간을 온전히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가끔 미용사들이 드나들며 카페 주인과 수다를 떨었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상상하며 마음껏 평화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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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 Mundos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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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 Mundos Cafe 

 

 

기분이 나빴던 적도 있습니다. 카페 종업원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체코인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 너무 달랐거든요. 그 와중에 커피는 또 왜 이렇게 맛있는건지ㅡ툴툴거리면서 카푸치노 한 잔을 빠르게 비우고 불편한 공기로부터 달아났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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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far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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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and Riot

 

 

한 카페에 여러 번 놀러 가기도 했어요. 제가 지금까지 마셔본 초콜릿 중 가장 특이한 맛이었거든요. 한 번은 뉘른베르크에서 동행을 했던 언니를 프라하에서 다시 만나 함께 리스트에 적힌 카페를 찾아갔습니다. 전날 밤을 새워 수다를 떠는 바람에 '커피로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Coffee and Riot'이라는 비장한 이름도 무너질 만큼 몽롱했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카페인으로 나른함을 이겨내며 충분히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


실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한 줄이면 끝날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자그마한 종이 한 장덕분에 적당히 익숙해진 프라하가 적당히 낯선 공간이 됐기 때문입니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어가, 비슷한 듯 다른 카푸치노를 마시고, 낯선 동양인이 수줍게 내민 종이에 주인이 어떤 반응을 보이며 도장을 찍어줄지 상상하는 일은 분명 여행이었습니다. 그 작은 종이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창밖을 목격했고, 매번 다른 카페를 다니며 매번 다른 감정에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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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동안 해왔던 여행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도장을 하나하나 모을수록 대단하고 색다른 경험이 아닌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프라하라서 특별했던 거구나. 아닌 척하지만 낭만에 지나치게 젖어있었구나. 프라하를 여행한다고 느끼게 해준 일이 아이러니하게도 프라하를 지극히 평범한 공간으로 채색했던 겁니다. 동시에 항상 벗어나고 싶었던 한국이, 나의 동네가 가까운 여행지처럼 느껴졌습니다.

 

20년을 넘게 살아 채취까지 나누어 가진 고향이, 지겹도록 배회하며 20대를 흘리고 다녔던 동네가 지겨워질 때면 프라하에서 카페 도장깨기를 하던 일을 떠올립니다. 일상을 어떻게 여행했는지를 곱씹어 봅니다. 그러면서 이곳을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합니다. 너무 익숙한 공간이, 조금은 낯선 공간이 될 수 있도록.

 

 

 

:: About 딴짓 ::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시간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슝슝 빠져나가는 게 아쉬울 때, 여러분은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저는 요즘 유투브를 보거나, 인터넷쇼핑을 하거나, 아니면 음악을 들으며 멍을 때리곤 합니다. 하지만 딴짓엔 역시 앨범 뒤져보기가 최고인 것 같아요. 사진을 훑어보며 지나간 여행,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냈던 즐거운 한 때, 조그마한 동네 길 고양이, 마음에 쏙 들었던 카페 등을 들춰보면 창문을 꽉 닫아놓아 이산화탄소만 가득 찬 방에 신선하고 깨끗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추억을 들여다보는 일도 그렇습니다. 아니, 오히려 효과가 더 클 수도 있어요. 카메라 렌즈를 돋보기 삼아 나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환기가 되는데, 타인의 사진을 들여다본다는 건 전혀 다른 시공간에 잠시 발을 담가보는 거니까요.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딴짓을 할 때 꺼내보는 체코에서의 추억을 여러분과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 글이 여러분에게 잠시 딴짓하기 좋은 아지트가 되길 바랍니다.

 

 

딴짓 Prologue

딴짓 Episode 01

딴짓 Episode 02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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