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일'을 위한 '오늘'의 기록 [도서/문학]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글 입력 2023.11.1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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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김초엽(1993- )의 첫 소설집이다. 김초엽은 중학교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가져 과학 분야의 책을 많이 접해왔고,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던 중 과학 소설 공모전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해당 소설도 SF 장르에 속하는데, 이때 작가는 ‘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는 SF 소설’을 작성하겠다는 창작 의도를 바탕으로 소설을 집필했다.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잠정적 진실을 끊임없이 세워나가며 진실에 다가가려는 목적으로 글을 썼다고 밝혔다.

 

그렇기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사회의 숨겨진 진실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심층적인 시선이 담겨있다. 책은 총 7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각 단편은 등장인물과 작품 배경이 상이하지만, 기술이 고도화된 사회의 양면성이라는 공통된 세계관을 공유한다.

 

대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 사회에서는 더 먼 우주 공간을 빠르게 넘나드는 웜홀 항법이 도입되어 대다수의 사람이 편의를 누리지만, 이것이 기존의 기술을 대체하자 과거의 방식을 따르던 소수의 사람들이 소외당하게 된다. 다른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연해 보이는 사회적 진실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제시된다. 이를 통해 작가가 창작 의도에 제시한 바와 같이 사회의 주된 가치관에 포함되지 못한 진실들에 관해 논의하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사회의 ‘진보’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했다는 점이다. 진보란 바람직한 목표를 향한 운동,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발전이나 전진을 말한다. 이는 과학적, 기술적 지식의 향상, 경제적 생산력의 증가, 사회조직의 복합성의 증대 등을 가져온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경우에서 우리는 쉼 없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사회의 진보가 발생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작가는 정지 상태가 오히려 사회의 진보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이른바 ‘진보의 역설’을 제시한다. 이를 뒷받침하고자 소설에는 사회 발전을 등한시한 채 비생산적인 삶을 영위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스펙트럼」의 연구원 희진은 우주에서 조난된 동안 외계 생명체의 삶을 체험하고 왔음에도,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연구에 활용하기보다는 이를 전부 함구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학자 안나는 오지 않을 우주선을 수십 년 동안 기다리며 정거장에서 시간을 허비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우주비행사 재경은 우주에 갈 채비를 전부 마쳤음에도 우주로 떠나는 당일에 돌연 바다로 도망쳐버린다.

 

기존의 ‘진보’의 정의를 활용한다면 이들은 사회에 불필요한 잉여적인 행위를 일삼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각 인물은 사실상,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사회의 문제를 인지하고 이에 저항하는 유일한 존재들이다. 희진은 연구를 위해 외계인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 문명을 경계했고, 안나는 기술의 적용 범위가 특정 사람들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지녔으며, 재경은 불필요한 우주 탐사를 강행하는 사회에 회의를 느꼈던 것이었다. 이들은 사회가 잘못된 종착지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에 제동을 걸고자 정지 상태에 머물렀다.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기술 발전의 합당한 방향에 관한 논의로 연결된다. 기술 발전의 기본 원리는 어제와 다른 내일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혁신을 추구하며, 그 결과 기술은 세계를 비가역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고도화된 기술이 역효과를 낸다면, 기술은 세계의 가역성을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한다. 기술의 발달 때문에 망가진 생태계를 복원하고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또다시 기술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소설 속 사회는 기술의 과도한 발전으로 인해 균형이 무너졌으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의 방향이 뒤집힐 필요가 있다. 이에 작가는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인물들을 제시함으로써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에 제재를 가하는 지혜와 용기를 진정한 의미의 진보로 제시하고 있다. 때로는 아무런 혁신도 추구하지 않은 채 멈춰있는 시간이 가장 앞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해당 소설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소설의 형식적인 측면에 있다. 일곱 개의 단편 소설 대부분이 액자식 구성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각각의 단편소설에는 자신 주변의 환경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결과 평범하지 않은 삶을 영위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등장한다. 관찰자는 해당 인물의 사연을 접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되고, 이를 통해 기존의 가치관을 성찰하는 모습을 보인다. 목차 순서대로 릴리 다우드나와 데이지의 관계, 할머니와 희진의 관계, 류드밀라와 연구원의 관계, 안나와 직원의 관계, 엄마와 지민의 관계, 재경과 가윤의 관계가 그러하다. 그 결과, 인물들이 홀로 세계의 진실을 인식하면서 감내해야 했던 외로움은 관찰자의 연대를 통해 집단적인 감정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양상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남자는 조종실 버튼에서 손을 놓았다. 문득 남자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먼 곳의 별들은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작고 오래된 셔틀 하나만이 멈춘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정말로 슬렌포니아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남자는 노인이 마지막 여정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일부 발췌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안나는 낡은 셔틀에 의존해서 슬렌포니아를 향해 여정을 떠나려고 한다. 슬렌포니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만 년이 걸리기에 그녀의 도전은 명백히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직원은 처음에는 그녀의 도전에 반대한다. 하지만 직원은 이내 가족으로부터 고립될 운명에 처한 안나의 비애에 공감하며 그녀의 여정을 응원하는 희망적인 시각을 보인다.

 

이러한 모티프는 다른 소설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생 가설」에서는 ‘수빈은 순간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느낀 적 없는 무언가가 아주 그리워지는 감정이었다.’라는 구절을 통해 류드밀라가 평생을 안고 살아간 그리움에 공감하는 연구원들이 등장한다. 「감정의 물성」의 주인공은 ‘그제야 어설프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라는 구절을 통해 여자친구 보현이 우울체를 구입하는 것에 집착했던 이유를 이해한다. 그리고 「관내분실」에서는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라는 구절에서 사회로부터 차단되었던 엄마가 느껴왔을 무력감에 공감하는 딸의 사연이 보여진다. 이들은 모두 관찰 대상의 삶의 내막을 찾아다닌 결과 그에게 연대감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액자식 구성을 빈번하게 활용한 원인을 추론해볼 수 있다. 소설은 겉보기에 미지의 생명체와 타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그 존재들을 탐구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세계의 진실을 마주했을 때 가치관의 변동을 겪으며 새로운 선택을 하는 자기 자신의 미지의 자아이다. 그렇기에 소설의 주제는 비밀스러운 타자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고, 이때 등장인물들이 다른 존재의 사연을 접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해당 주제의식을 고려했을 때, 내화와 외화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액자식 구성은 작가의 의도를 구현하기에 최적화된 틀이었을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작가의 소설 전개 방식은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소설의 장르가 SF임에도 과학적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과학을 통해 인간성을 설명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부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굳이 과학적인 소재를 끌고 올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한 회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시도는 기존의 SF 문법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해당 소설만이 지니는 특별함이라고 해석하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작가가 제시한 미래의 사회 문제가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점이다. 작가는 미래에 만들어질법한 기술들을 제시하고, 이로 인해 파생될 사회 문제를 상상해보는 방향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작가가 제시하는 대다수의 사회 문제들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타사는 분리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심은 개조인들의 구역으로, 도시 외곽은 비개조인들의 구역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중략) 캘리포니아 대지진으로 서부 도시들이 황폐화되자, 신인류로 태어나지 못한 비개조인들이 서부로 밀려났다. 재앙 이후에도 굳건했던 동부의 도시는 대부분 개조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 일부 발췌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전자 조작이 성행하는 사회를 제시한다. 유전자 조작 기술에 의해 이상적으로 디자인된 인류는 ‘개조인’이라고 불리며, 이들은 비개조인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인식된다. 한편 비개조인은 사회 다방면에서 차별을 받고, 그중에서도 거주지의 분리로 인한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해당 문제를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봤을 때 거주지의 분리는 비단 미래 사회에서만 일어날 문제가 아니다. 이미 현대 사회에서도 지대 및 지가 지불 능력의 차이에 따라 도심이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세계적인 도시 뉴욕의 경우 맨해튼 지역은 세계의 상업, 금융, 문화의 중심지로서 월 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가 위치한다. 그러나 인근의 브롱크스 지역은 1960년대 재개발을 원인으로 집을 잃은 가난한 히스패닉계와 흑인들이 거주하는 빈곤한 동네이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사람들의 거주지가 소설처럼 정책에 기반하여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경제력을 근본적 원인으로 하여 빈곤한 사람들이 도심으로부터 밀려났다는 점이 동일하기 때문에 작가의 주장이 그다지 새로운 논의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 밖에 「감정의 물성」에서 사람들이 의미가 배제된 감정 그 자체를 소비하다가 물질에 속박되는 양상은 현대 사회에서 성행하는 마약과 비슷하며,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미혼모이자 장애를 지닌 동양인 여성이 우주비행사로 발탁된 것에 대해 비난하는 칼럼과 댓글들이 쏟아지는 인터넷의 현실도 우리 사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작가가 참신한 과학 기술들을 고안해냈음에도, 이것이 사회에 미칠 영향에 관해서는 그만큼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에는 기술의 보급이 가져올 파급력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부족했다. 소설의 배경은 기술 발전이 고도화된 사회이지만, 그 사회에서 등장하는 문제는 현재와 큰 차이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해당 소설이 의미있는 이유는 낯선 대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여, 독자로 하여금 우리 세계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하도록 도왔다. 더불어 우리가 잊어버린 사회적 가치에 대해 상기시켜준 점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작가의 논의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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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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