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있는 그대로 온전한 나 - 뮤지컬 헤드윅 [공연]

스스로 온전한 사람으로서 내딛는 성숙한 사랑으로의 첫 발
글 입력 2024.04.2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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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사랑을 할까?

 

상처 받고 눈물 흘리다가도 왜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하나가 되려고 할까?

 

언젠가 그 끝에 운명의 상대를 만나 동화같은 사랑을 하게 될까?

 

우리는 결국 누구이길래, 사랑을 하고 사랑을 열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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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너머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헤드윅은 냉담한 어머니와 성추행을 일삼는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 실패한 성전환 수술, 미국으로의 이주, 좌절된 아메리칸 드림과 연인의 배신이 이어지는 기구한 삶을 살아냈다. 그는 자신의 밴드 앵그리 인치와 함께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 놓는 공연을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체성과 버림받고 상처받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한다.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플라톤의 <향연>을 차용한 ‘The Origin of Love’ 넘버에서 설명하는 ‘사랑의 기원'이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는 해의 아이, 땅의 아이, 달의 아이의 세 성별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각각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합된 형태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의 개념도, 외로움이나 두려움도 알지 못했고,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던 신들에 의해 각각 둘로 갈라져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신화에서는 이렇게 흩어진 서로의 반쪽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사랑의 기원이라고 설명한다.


헤드윅은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이 신화를 통해 자신의 반쪽을 찾는 데 전념한다. 언젠가 운명적 상대를 찾게 되기를 소망하며 사랑하고, 버림받고, 상처 받기를 반복한다.

 

 

 

헤드윅의 반쪽 찾기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인류가 자연과의 원초적 합일에서 벗어나면서부터 그와 유사한 인간적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본질적 갈망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대한 완전한 해답이 곧 사랑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사랑이 이러한 결핍과 합일의 열망에 대한 완전한 해답이려면 그 사랑이 몇 가지 조건을 갖춘 성숙한 사랑이어야만 한다.


에리히 프롬이 ‘공서적 합일'이라 지칭하는 미성숙한 사랑은 의존적인 관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다른 이에게 복종함으로써, 혼자서 견뎌내기 어려운 고립감이나 소외감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형태의 미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타인의 일부가 됨으로써 분리감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결정이나 모험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반대로 다른 한 쪽은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아끼는 상대방을 지배하고 착취함으로써 고독의 감정으로부터 도피한다. 결국 두 입장 모두 각자의 개성을 해치며 서로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헤드윅은 루터, 토미, 이츠학과의 관계에서 서로 다른, 그러나 지속적으로 ‘미성숙한 사랑'의 면모를 보여준다.


‘슈가 대디’ 루터와의 관계에서 헤드윅은 그에게 크게 의존하며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공서적 합일'의 모습을 보인다. 루터와 애정관계를 유지하며 헤드윅, 즉 한셀은 수많은 물질적 보상을 얻었고, 미국으로의 이주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그는 루터와 함께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포기하며 성전환 수술을 받아야만 했고, 수술이 잘못되어 남은 1인치의 살덩이와 함께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루터의 연인으로서 그의 일부가 되기 위해 남자라는 자신의 개성을 포기한 것이다.


반대로 현재의 헤드윅은 루터와의 관계에서와는 정반대의 구도로, 이츠학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분리감을 회피하려 한다. 이츠학에게는 여장도, 가발도 금지하며 그를 비난하고, 자신이 원하는 행동만을 강요한다. 이 관계에서 헤드윅은 이츠학의 개성을 흡수하고 그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고독과 무력감을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다.


토미와의 관계는 특별했다. 헤드윅은 물론 토미에게 많이 의지했지만, 토미는 루터처럼 그를 억압하지 않았다. 반대로 헤드윅 또한 이츠학에게 하는 것처럼 토미를 억압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능동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닮아갔다. 둘은 마치 오래 전부터 정해진 영혼의 짝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랬던 토미도 헤드윅이 가진 1인치의 살덩이에 대해 알게 되자 그를 떠나 버리고 만다. 토미는 있는 그대로의 헤드윅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헤드윅은 그런 토미를 원망하며 이해와 사랑을 갈구했다.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특성을 유지하며 함께할 수 없었다. 결국 운명의 반쪽이라고 여겼던 토미와의 사랑도, 온전히 성숙한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이야기하는 성숙한 사랑은 희생이나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으로 인해 각 개인의 개성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본질적인 결핍을 해결하는 성숙한 사랑이란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유지하면서 상대방과 합일을 이루는, 받는 것이 아닌 주는 행위를 통해 성립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성숙한 사랑을 하는 두 존재는 하나가 되면서도 동시에 별개의 두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헤드윅이 찾고 싶었던 반쪽의 존재, 그리고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완전해진다는 그가 스스로 완전할 때에만 유효하다. 자기자신을 잃어버리고 상대방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사랑은 결코 완전한 합일이 될 수 없다. 두 사람의 존재가 올곧게 서 있지 않다면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두 인간이 합쳐진 형태의 완전함이 아니라 비대해진 반쪽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내 모습으로, 비로소 자유로운 밤


 

극 말미 토미는 헤드윅을 향해 진심을 담은 노래를 부르며 그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그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함께 이제는 사랑에 매달리기보다는 스스로 완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토미의 노래를 들은 헤드윅은 진짜 그를 가리고 화려하게 치장하던 가발도, 옷도 모두 벗어던진 채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여자로서만 사랑받을 수 있다 여겼던 지난 날을 뒤로 하고, 그는 진짜 자기 자신으로서 비로소 자유롭다.


자신의 고독과 무력감을 해소하기 위해 억압해왔던 이츠학에게도 자유를 준다. 이츠학이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진짜 자신이라고 받아들이는 스스로의 모습을 할 수 있도록 그에게 가발을 건네준다. 여자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회복하며 환하게 웃는 이츠학과 가발도, 옷도, 구두도 없이 벌거벗은 채 홀가분한 헤드윅. 어쩌면 헤드윅이 억압하고 있던 것은 이츠학이 아닌 그와 닮은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짜 자기자신으로 돌아온 이들은 바로 그 순간 완전하고, 온전히 자유롭다.


헤드윅은 이제 성숙한 사랑으로의 첫 발을 디딜 준비가 되었다. 세상의 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혼자서도 온전하고 충만한 존재로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것이다. 더 이상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며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능동적으로 찾아 나갈 것이다. 그리고 훗날 진짜 운명의 반쪽을 찾게 되었을 때, 커다란 반쪽이 아닌 완전한 하나의 합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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