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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sasa
{Jellyfish Monologue}
2. 빛이 쓰다듬은 밤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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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바다 위로 달기둥이 곱게 뻗었다. 해파리는 파도를 투과해 저마다 다른 높이로 바닷속에 고인 빛을 계단 삼아 달에게 다가갔다. 살금살금, 보는 이 하나 없지만 괜스레 비밀스럽게. 엷푸른 빛 일렁이는 말랑한 헤엄이 빛줄기 사이로 떠오른다. 부서진 파도 끝에 튀어 오른 물방울이 투명한 몸통 위로 서늘한 점을 찍고, 밤공기는 소금기 품고 시린 사이. 저 올곧은 하양은 시선으로 어루만지기에 따스해서. 해파리는 달을 좇았다. 온기는 없었으나 애정이 작은 주변에 만연했다.
해파리는 달을 좋아한다. 눈 맞출 수 있는 가장 밝은 빛이 있다면 그건 달의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가진 빛을 영원히 덧대어도 이 포근한 빛은 될 수 없겠지] 부러움이 깃든 애정. 음, 그런데. 정말 ‘부러움’이고 ‘애정’일까. 몇 단어론 형언 불가한 오묘한 마음이지는 않을까. 우리의 모든 마음이 사실은 그러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결국 하나의 세계에 불과할 섣부른 언어로 마음이 재단되지 않도록 잠시 함구한다.
달기둥에 몸을 뉜 해파리의 희미한 푸른빛이 달빛을 입었다. 빛이 빛을 감싸안는다. 파도를 베개 삼아 달을 바라보던 해파리는 달기둥 끝으로 떠밀려갈 때마다 뉘었던 몸을 세워 달과 가장 가까운 자리로 다가가길 반복했다.
[사랑받고 있을 거야]
애정 위로 부러움이 봉긋 튀어오른다. 목소리를 듣곤 숨죽여 미소 짓고 말았다. 작고 귀엽고 소심한 뾰루지 같은 마음이잖아. 무언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는지 해파리는 시선을 내려 투명한 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하느작하느작 밤바다 어둠에 묻힌 다리에 먼저 시선이 닿았다. 천천히 시선을 끌어당기면 어슴푸레한 빛이 일렁이는 몸이 눈에 담기고, 그 안에 머무르는 나의 시선에는 먼지 같은 플랑크톤처럼 부유하는 발광 물질들이 보인다. 여린 빛이야 그렇지? 내면에 머무는 나에게조차도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겨우 보여서 ‘살아있었구나’ 불러주곤 했던 작은 빛무리. 그러고 보면 해파리의 상념도 밤이 되어서야 더 선명해졌던 것 같다. 빛마저 시선을 거둔 까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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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빤히 들여다보는 해파리와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독백 뒤로 숨어 빙글빙글 종종걸음 하다 방바닥에 개울처럼 흐르기 시작한 상념을 발견했다.
해파리는 넘실거리는 달빛 위를 부유하는 중이다. 여름의 녹진한 바람이 흐르는 속도 만큼 느리게. 독백도 고요한 만큼 영롱하다. 이런 마음. 기분. 온전한 편안으로. 어여쁜 상상 속에 빠져든 것일 테다. 나는 가만히 머무르며 밤바다를 닮아 검푸르게 흐르는 물줄기를 눈에 담았다. 무슨 상념일까. 독백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언어에 붙잡히지 않은 채 흐르고 싶은 마음일 테고, 의문이 가시를 세우지 않고 녹진한 불안 한 점 없으니, 안온. 호흡만으로도 흡족한 안온함. 그래서 어여쁘다. 불안이 익숙한 내겐 꿈만 꾸던 생경한 순간이어서 함께 느끼고픈 마음에 가만히 머무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느다랗게 흐르던 상념은 둥그스름한 모양으로 고여 해파리의 안과 밖에서 일렁이는 빛이 드리울 자리를 내어준다. 엷푸른 작은 빛무리부터 저 멀리 뜬 달의 빛까지 품어보려는 마음에 윤슬이 맺힌다. 비밀스러운 빛과 상념의 호응. 예쁘지. 참으로 예쁜 순간이야.
연못 모양의 꿈. 거기에 바다와 하늘. 영원히 닿을 수 없기에 공존하는 각자의 세계에서 빛 머금은 존재들이 서로를 마주한다. 어둠에 닳아 희미한 지평선. 단조로이 나뉜 한 풍경을 뒤집는다. 해파리는 작달막한 달이 되고 달은 해파리가 된다. 거대하고 영령玲玲한 자태로 파도에 떠밀리지 않는 굳건함으로 물살을 가르겠지. 여린 아기같이 말랑한 달은 구름을 이부자리 삼아 까만 바닷속을 환히 비추는 해파리에게 눈빛을 총총히 뿌릴 것이다. 저 깊은 미지의 세계에게 보내는 쪽지처럼 [예쁘다, 예쁘다]. 곧 자연의 법칙을 채 깨닫지 못한 달이 바다를 향해 낙하한다. 차가운 공기를 가로지르면 뺨에 물방울이 간지럽게 스치더니, 곧 너른 물의 세계가 달을 받아낸다. 지상의 바람은 너무도 시렸고, 달은 온기를 찾아 바다의 품속을 더 파고들었다.
몽상에 잠긴 해파리는 천천히 가라앉는 중이다. 나는 여전히 기다리며 잔잔하게 부서진 수면을 매만지며 흩어지는 달빛을 눈에 담았다. 밤의 윤슬을 머리맡에 두고 부유하는 순간은 아무나 헤아릴 수 없을 비밀이리라.
내면 곳곳에 포근한 빛이 가득하다. 달빛을 한껏 머금었는데. 해파리는 달을 닮지 않고 더욱 해파리 자신이 되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호기심이 생긴다. ‘나.’ 흡족한 ‘나’가 되는 것. 달빛을 빌린 해파리의 충만함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달빛을 정말 빌린 것일까? 내가 나로 빛난다는 건 무엇일까. 홀로 남아 ‘나’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거짓말 같은 순수 대신 서로의 빛깔로 존재하는 꿈을 그려본다.
파스스. 돌연 귓등을 까슬한 빗으로 빗질하는 양 간지러운 소리가 내면 가득 울려 퍼진다. 등 뒤로 커다랗게 번져오르는 빛에 놀라 곧장 뒤를 돌아봤다. 번개 번쩍이듯 서있는 사물들 뒤로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우던 빛은 어디론가 도망치듯 금세 사그라들었다. 독백에는, 이걸 뭐라 해야 할까, 동그란 ‘빛 뭉치’ 하나가 남아있었다. 꽃자루에 둥글게 맺힌 민들레 홀씨를 닮았달까. 작은 입김에 홀씨들이 흩날리듯 내면 곳곳에 내려앉은 빛에 방은 빛 범벅이 되어있었다. 독백에도, 바닥에 흐르던 상념에도, 고여있던 작은 연못에도, 상념에 젖은 발등과 눈동자에도, 한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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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지만 눈부시진 않았다. 그래, 저 달빛처럼. 안 보이는 게 더 좋았을지 모를 방 구석구석이 지나치게 선명해진 탓에 잠시 현기증이 일어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정말, 홀로 오롯한 빛이란 건 무엇일까.
존재. 그건 충분한 빛이 되어줄까, 물으며 안으로 불쑥 들어와 곳곳을 헤집는 눈빛들은 어리석어서 그들이 두 눈을 깜박일 수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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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꿈.
새장 문턱에 걸터앉은 눈빛. 창살 사이로 고갤 내민 달을 품에 안아 - 망설이는 고요한 허밍. 희끄무레 퍼지는 선율은 눈빛 곁을 사근사근 맴돌다 사라진다. 목소리의 주인. 입술을 달싹이며 나가기를 주저한다. ‘이름 없이 흐르길 원해요. 영원히.’ 그런 소망. 창살이 곧게 선 요람에 눈빛만이 비밀스럽게 앉아 있다. ‘아늑한 그네에 숨어 앉아 숨 쉬고 싶은데.’ 그런 소망. ‘이게, 나의 빛, 이야.’ 숨 한 줌 새장에 넣어둔 눈빛이 고백한다. 곧 문을 잠근다. 반작이는 감옥. 밤공기가 스며들어와 숨을 조몰락거린다. 온도도 형태도 하염없이. 눈빛은 우연의 광경을 눈에 담는다. 저게, 나?
어느 날 제빛이라 여긴 숨이 사라진다. 응당 도래할 숨의 순간. 허옇게 밀려오는 밤의 끝. 근데, 사라진다? 눈빛은 애초에 홀로였지. 눈빛은 스스로 방치된다. 무언가 잘못되었으나 애초에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숨 한 줌처럼 여전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 채. 망각했던 두 팔을 휘적이면 숨겨두었던 작은 몸이 여기 있다. 심장의 자리를 눈길로 가늠하려 고갤 숙인 눈빛은 비로소 눈빛을 마주한다. 눈빛은 눈빛을 눈여겨 바라보고자 둥그렇게 웅크린다. 뭉근하게 짓누르는 존재의 무게. 눈빛은, 온몸으로 어루만진다. 여기 있었지. 늘 드리웠었지. 그 첫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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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끝자락이 밀려온다. 내면을 뒤덮은 빛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방 안은 서로가 헷갈리는 몽상으로 가득해 포근하다. 해파리의 것. 나의 것. 어슴푸레한 새벽을 닮은 우리의 작은 빛무리. 그런 마음. 환한 낮에도 우린 여기 있었지. 늘 드리웠었지. 시야 너머의 그림자에도, 심장 곁에도, 살아가기에 일렁이는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