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캐릭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년 展,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 [영화]

글 입력 2019.10.3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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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써 한국영화는 100주년을 맞이했다. 한 세기라는 어쩌면 짧고, 길기도 한 시간동안 한국 영화는 무수히 많은 발전을 했다. 그 성과를 기리듯 올해엔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관련 행사들이 쏟아졌다. 다양한 영화제 행사들도 흥미로워보였지만, 그 중 내 시선을 사로잡은 행사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여성캐릭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년 展,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 전시회다.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아가 본 건 처음이었는데, 의외로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 상암 MBC 근처에 있는 갈색 건물 안에 들어가자 전시회 포스터가 크게 걸려있었다. 내가 잘못 찾아온 게 아니라는 듯 아주 대문짝만하게 말이다. 항상 유료 전시회만 다니던 나는 무료 전시가 사뭇 어색해 매표소가 있나 둘러보기도 하고 쭈뼛대면서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새빨간색, 조금 응고된 듯한 혈의 색, 팥죽색 등 전시장 안은 전체적으로 붉은 톤으로 색감을 잡은 듯했다. 주제에 맞는 아주 잘 어울리는 컨셉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전시장 안에 들어서기 전 소개글을 찬찬히 읽었다.

 

“카메라는 근복적으로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을 응시한다. 남성을 시선의 주체로 여성을 시선의 타자로 위치시키는 이분법은 여성을 남성의 시선, 즉 성적 욕망, 감시,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로라 멀비, 1975, 「시각적 쾌락과 서사 영화」)



이는 한국영화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던 세계영화사에서도 어김없이 해당되는 말이다. 과거 남성 중심의 영화 산업 시스템 속에서 여성은 남성들의 시선에 의해 이상적이거나 혹은 왜곡된 캐릭터로 만들어졌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주체적인 면모를 보이는 여성 캐릭터들은 이른바 ‘나쁜 여자’, 혹은 ‘이상한 여자’가 될 뿐이었다. 이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내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철저히 남성 중심이었던 영화 산업은 1990년대가 되어서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여성인권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이 높아지고, 여성 감독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때와도 맞물린다.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본 영화가 생겨날수록, 여성 캐릭터들은 더욱 진화하며 다양해졌다. 여성들은 자신이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는 캐릭터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 니즈에 따라 이제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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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주인공을 캐스팅해 여성 중심의 서사를 선택하는 영화는 많지 않다. 최근 10년간 극장 개봉작 중 여성 감독의 영화는 10%가 채 되지 않으며, 여성이 주연인 영화는 20%대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이번 전시는 한국영화 100년을 맞이하여 소위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로 불린 한국영화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전시이다. 여성 캐릭터들을 주체적이고, 역동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더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여성 캐릭터가 출현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전시를 전부 다 둘러보는 데는 큰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짧고 굵었다. 전시는 한국영화상 여성 캐릭터를 6가지 유형으로 섹션을 나누어 소개하고 있었다. 키워드는 차례대로 ‘불온한 섹슈얼리티’, ‘위반의 퀴어’, ‘초능력’, ‘비인간 여자’, ‘법 밖에 선 여성’, ‘엄마의 역습’이다.
 
 

Section 1. 불온한 섹슈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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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악녀’나 ‘팜므파탈’로 불려온 ‘불온한 섹슈얼리티’들은 자기애적 정체성을 표현해내기 위해 섹슈얼리티를 ‘불온’하게 사용한다. 물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남성을 초과하고 공동체의 윤리를 넘어설 때 불온한 섹슈얼리티들은 응징 당한다. 이 캐릭터들이 주는 영화사적 교훈은,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는 여성 캐릭터는 매혹적이지만 결국은 비극적인 결말을 자초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미몽: 죽음의 자장가>(1936, 양주남), <지옥화>(1958, 신상옥)의 양공주 소냐(최은희), <운명의 손>(1954, 한형모)의 북한 공작원 마가렛(윤인자), <자유부인>(1956, 한형모)의 바람난 교수부인 오선영(김정림), <하녀>(1960, 김기영)의 하녀(이은심), <산불>(1967, 김수용)의 사월(도금봉), <뽕>(1985, 이두용의 안협네(이미숙).  

 


과거는 불온한 섹슈얼리티’도 모성 내에서 존재할 때만 긍정될 수 있었으나, 현대에 이르러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더 이상 불온하게 재현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숨김없이 드러낼 뿐이다.

 

<해피엔드>(1999, 정지우)의 최보라(전도연), <처녀들의 저녁식사>(1988, 임상수), <바람난 가족>(2003, 임상수)  

 

 


Section 2. 위반의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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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에서 여성 퀴어는 비뚤어진 욕망, 소녀 시절의 낭만, 남성혐오의 징후, 기만과 범죄, 질병, 유령, 화상 등으로 등장해왔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부장제와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위반이었다. 대개 여성의 동성애는 서사적으로 남성폭력의 트라우마나 이성애의 대체재로 설명되며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텔미썸딩>(1999, 장윤현)에 이르면 90년대 말엔 냉혹한 연쇄살인범이 되어 남성을 처형하기도 한다.

 

<질투>(1960, 한형모)의 재순, <금욕>(1976, 김수형)의 미애(한문정, <사방지>(1988, 송경식)의 사방지(이혜영)와 이소사(방희), <텔미썸딩>(1999, 장윤현)의 채수연(심은하)

 


2000년대 이후 영화들은 더 이상 여성동성애를 남성폭력의 트라우마나 범죄로 묘사하지 않는다. 여고괴담 시리즈와 같은 이른바 ‘여학교 영화’는 남성 없는 세계에서 여성들의 관계와 서사에 집중한다. 이후 여성 퀴어는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모든 험담과 음모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탈주하는 레즈비언 이미지를 스크린에 선사한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김태용.민규동), <여고괴담4:목소리>(2005, 최익환), <써니.(2011, 강형철),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2015, 이해영)
<도희야> (2014, 정주리)의 영남(배두나), <아가씨>(2016, 박찬욱)의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
 



Section 3. 초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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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은 대체로 여성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위험한 것으로 상상됐다. 그러나 이제 여성 초능력자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활발한 여성 신체를 목격하는 것이 흔하지 않는 과거 한국영화와 달리, 초능력에 가까운 힘을 가진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이 늘어나고 있다. 액션초능력자들이 선사하는 쾌감이란 여성으로 하여금 조신한 모습을 요구하는 이 사회에 저항하면서 능력을 발휘하는 여자들을 보고 느끼고 확인하는 쾌감일 것이다. 더 많은 초능력자들의 도발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다.

 

<마법선>,(1969, 이창근)의 선아공주(윤정희), <무정검>(1969, 권영순), <유정검화>(1970, 권영순)의 여검객(홍세미), <초감각커플>(2008, 김형주), <박쥐>(2009, 박찬욱)의 태주(김옥빈), <겨울왕국>(2013)의 엘사, <악녀>(2017, 정병길)의 숙희(김옥빈), <옥자>(2017, 봉준호)의 옥자-미자, <마녀>(2018, 박훈정)의 구자윤(김다미), <캡틴 마블>(2019)

 

 
 

Section 4. 비인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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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수의 괴물이 한국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부터다. 스크린 속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유연하게 동물과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일 먼저 출현한 여성-동물의 형상인 ‘뱀’부터, ‘고양이’, ‘나비’등 곤충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혐오 동물이 된 여성은 남성 불안의 투사체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남성의 시선이 여성들을 뱀, 벌레, 곤충, 고양이로 만든다. 공적인 분노로 분출되지 못한 남성의 울분이 그 배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사부인>(1960, 신상옥)의 백사(최은희), <사녀>(1969, 신상옥), <사녀의 한>(1970, 이용민), <살인마>(1965, 이용민), <이조괴담>(1970, 신상옥), <묘녀>(1974, 홍파)와 <정형미인>(1975, 장일호), <흑묘>(1975, 김시현), <충녀>(1972, 김기영)의 영자(윤여정),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김기영), <화녀>(1971)  

 

 
 

Section 5. 법 밖에 선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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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에서 ‘나쁜 여자’란 남성의 지배를 거부한 혹은 남성이 길들이기 힘든 여성을 말한다. 이러한 나쁜 여자 캐릭터는 1970년대 활극 영화로 넘어오면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무법의 세계에서 활약하는 ‘나쁜 여자’로 등장한다. 성만 여성이고 남성으로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그들은 전통적인 성 역할에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운 악녀>(1958, 이강천)의 은미(최지희), <홍콩에서 온 마담장>(1970, 신경균)의 미령(정혜선), <54번가의 마담>(1971, 최영철)의 성란(최지희), <20인의 여도적>(1971, 이지룡)의 여도적들.  

 


2000년대 이후 액션 영화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나쁜 여자’는 남성의 시선에 의한 낙인이 아닌 스스로 ‘악녀’가 되기를 감행한 여성들이다. 이들은 적어도 폭력을 통한 개인적인 복수에 자기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죄책감과 자기 갈등을 드러낸다.

 

<조폭마누라>시리즈(2001, 2003)의 차은진(신은경), <피도 눈물도 없이>(2002, 류승완)의 수진 (전도연), 경선(이혜영), <친절한 금자씨>(2005, 박찬욱)의 금자(이영애),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장철수), 복남(서영희).

 


반면 2010년 전후부터 등장한 ‘나쁜 여자’는 노골적으로 ‘악'을 행사하면서 용병이 되어간다. 여성은 이제 돈과 권력,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과 폭력, 배신과 음모를 꾸미는 ‘악녀’로 변화한다.

 

<차이나타운>(2015, 한준희)의 엄마 (김혜수), <미옥>(2017, 이안규)의 현정(김혜수).

 


이제 나쁜 여자는 여자 경찰이 되어 법의 수호자로 변화한다. 법 밖의 ‘나쁜 여자’가 사라지고 법의 수호자인 ‘착한 여자’의 출현이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장르적 재현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걸캅스>(2019, 정다원)

 

 
 

Section 6. 엄마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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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사회의 신화화된 모성의 개념이 확립된 상황에서, 아이들의 죽음이 전제되는 순간, 스크린 속 여성들은 단 한순간도 그 책임에서 해방될 수 없는 원죄를 지게 된다. 스스로를 가해하거나, 칼과 총을 들거나, 또 아이의 죄를 은폐하기까지 하는 엄마들의 얼굴은 드라마, 범죄스릴러, 액션 장르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며 극단적인 광기의 표정으로 묘사되어 왔다.

또한 단순히 엄마와 딸로 규정지어지는 관계를 넘어 서로의 아픔을 돌아보는 약자의 연대로 귀결되는 작품도 등장했다. 여성의 절대적 희생을 요하는 모성의 신화를 깨는 것, 그 벗어남의 끝에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손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와 캐릭터의 진일보에 기대를 더해본다.

 

<미몽>(1936, 양주남)의 애순(문예봉), <미망인>(1955, 박남옥)의 이신자(이민자), <어미>(1985, 박철수)의 홍여사(윤여정), <오로라 공주>(2005, 방은진)의 정순정(엄정화), <세븐 데이즈>(2007, 원신연)의 한숙희(김미숙), <마더>(2009, 봉준호), <비밀은 없다>(2015, 이경미)의 연홍(손예진), <미씽:사라진 여자>(2016, 이언희)의 지선(엄지원)과 한매(공효진), <미쓰백>(2018, 이지원)의 백상아(한지민)과 김지은(김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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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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