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주 갑작스러운 여행기 [여행]

아무도 모르는 밀양에서
글 입력 2019.10.07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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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나는 밀양으로 떠났다. 특별한 계기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레 아무도 모르는 어떤 곳으로 떠나고 싶었고, 근교 여행지를 찾다 보니 밀양이 제일 적합했을 뿐이다.

 

원래 관광지나 역사 유적지부터 맛집까지, 여행의 모든 것을 계획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에 이런 즉흥 여행은 내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처럼 생애 첫 나의 즉흥 여행기를 이번 오피니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 아주 조용했던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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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기차역은 시끌벅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이런 곳에 내린다고?’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내리기 전 창문 너머로 보인 밀양역은 정말 고요했고 아무런 인기척도, 건물도 없었다.

 

그리고 밀양역은 내가 여태껏 봐온 기차역 중에서 제일 작았다. 평소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타면서 지나친 밀양역은 다소 무섭게 느껴졌지만, 여행하는 오늘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그간 도착했던, 맛있는 음식점들과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했던 역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이었다.

 

오직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의 미묘한 느낌이 좋았다.

 

 

 

# 시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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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비한 비닐하우스와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 파란색 크레파스 칠한 것 같은 하늘, 거친 흙길, 코를 찌르는 소똥 냄새, 이름 모를 꽃, 무섭게 생겼지만 성격이 순한 강아지, 정자에서 고스톱을 치는 할머니들. 30분에 한 대씩 오는 마을버스를 타고 마주한 밀양은, 평소 집과 회사만 오가는 내가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주로 ‘6시 내 고향’ 같은 TV 프로그램에서만 봤던 풍경이 내 일상이 됐다는 게 신기했다. 쨍한 햇볕과 어디선가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고 길을 걸으면서, ‘달큰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간 늘 핸드폰과 이어폰 너머의 음악에만 집중했던 내게, 주변의 모습과 소리를 들을 기회는 참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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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하고도 이색적이었던 자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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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와 풀, 바람만 가득했던 길목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간 곳에는, 깔끔해 보이는 중화요리 전문점이 있었다.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이 강촌에 중화요리 전문점이라니···.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렸고 나는 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곳엔 수십 명의 사람이 줄지어 있었다. 아니, 도대체 자장면이 뭐라고 이토록 줄을 서서 먹는단 말인가. 왠지 모를 궁금증이 나를 줄 서게 했다. 대기시간이 무려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순전히 호기심만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내게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는 점도 한 시간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먹은 자장면은 정말 평범한 맛이었다. 오랜 시간 숙성시킨 자연 발효 춘장으로 만들어 색깔이 황금색이라는 이유 말고는, 집 앞 자장면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맛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끝에 먹은 음식이 별로였다는 점에 대해 아쉬움이 있진 않았다. 어차피 즉흥 여행이었고, 이 여행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하진 않았으니까. 실망감이 없는 것 또한 즉흥 여행만이 지니는 매력이었다.

 

 

 

# 특별한 하루를 완성해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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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없는 자장면을 먹고 나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식당에서 차를 타면 5분 만에 갈 수 있는 영남루로 향했다. 영남루가 정확히 어떤 역사를 지니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몰랐다. 평소의 나였으면 관광지의 역사와 방문 시간 등을 철저히 파악했겠지만, 이번 여행에선 그러지 않았다. 잘 알아보지 않았기에 불안한 마음도 살짝 들었지만, 그 불안함은 이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막상 기대하고 갔건만 문이 닫혀 있었다. 방문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아까 자장면을 줄 서서 먹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생각하니 후회가 마음을 지배했다. 그런 와중 부정적인 생각을 말끔히 바꾼 건 눈앞의 야경이었다. 높은 건물과 형형색색의 불빛은 아니지만 은은하게, 조용히 빛나는 야경이 매력적이었다.

 

강에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냄새도 멋진 야경에 한몫했다. 소박하게 빛나는 시골의 밤빛은 내가 한 시간 넘게 기다린 건 자장면이 아닌 이 야경이라고,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야경을 본 그 순간은, 보기만 해도 위로가 된 시간이었다. 어쩌면 아주 힘든 날 위로 받기 위해 이곳을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밀양에서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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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의 밀양 즉흥 여행은 마무리됐다. 다른 여행기처럼 둘러본 곳이 많지 않아, 과연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유명한 관광지와 유적지, 맛집을 최대한 많이 둘러봐야 비로소 여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다녀온 후 여전히 남아있는 예쁜 추억과 밀양에 대한 좋은 기운들은 이런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곳에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면, 치이고 불안했던 일상을 벗어나 위로를 받았다면 충분히 여행 아닐까. 이처럼 즉흥 여행이든 계획적인 여행이든 떠나는 모든 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밀양을 떠나면서 생각했다.

 

 

[황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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