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이라는 블랙홀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3
글 입력 2024.05.0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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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2월 2일에 갇힌 한 남자가 있다. 잘나가는 기상 예보관이지만 ‘왕자병’ 수준의 자기애를 뽐내고, 경악할 수준의 사회성을 지닌 필 코너스. 그는 성촉절 취재를 위해 펑서토니에 갔다가 예상치 못한 폭설로 인해 발이 묶인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는 호텔에서 끔찍한 찬물 샤워를 하고 잠든 다음 날, 그를 깨운 익숙한 알람 소리.

 

이유 모를 기시감에 의아함을 느끼던 그는, ‘어제’의 하루가 똑같이 반복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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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6시에 울리는 알람 시계, 성촉절을 알리는 라디오 뉴스, 문밖에서 마주치는 남자와 체크아웃을 묻는 아주머니. 이게 다가 아니다. 돈을 구걸하는 노숙자, 친한 척 말을 거는 보험 판매원, 발을 젖게 만드는 물웅덩이까지.

 

필은 도저히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이 모든 사건들을, 매일 똑같이 반복한다. 성촉절 이후의 모든 하루에서, 완벽히 동일하게 말이다.


폭설 때문에 끊긴 장거리 전화선이 언제 복구될지 묻는 그의 물음에, 상담사는 대답한다. ‘아마 내일쯤’일 것이라고. 그러자 필이 답한다. “내일이 안 오면요? 오늘도 안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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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은 이 믿기 힘든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탁자 위에 놓인 연필을 부러뜨린 뒤 잠에 든다. 그러나 눈을 떠보니 부러진 연필은 원상 복귀되어 있고, 또다시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이제 정말 미쳐버릴 지경인 필은, 볼링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한다.


“시시한 곳에 처박혀 매일매일이 똑같고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다면, 당신들은 어쩌겠어요? 내일이 없다면 어떨까요?”


그러자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답한다. “내일이 없어요? 그럼 뭘 해도 상관없고 숙취도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죠!” 이 말은 들은 필은 뭔가를 크게 깨달은 듯이, 사회적 규율에 묶여있던 자신의 과거를 한탄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때로는 모험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앞으론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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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내뱉은 그는 다음날부터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바로,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를 이용하여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것. 필은 직장 동료인 리타에게 무엇을 좋아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남자를 좋아하고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

 

리타는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우리가 그런 질문을 할 사이는 아닌 것 같다’라고 딱 잘라 말하고, 자신은 ‘너무 겸손해서 자신이 완벽하다는 걸 모르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답한다. 똑똑하고 사려 깊고 용감하지만, 거울은 자주 안 보는 남자. 동물과 아이들을 좋아하며 악기도 연주할 줄 아는 남자.

 

마치 ‘너는 절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녀의 말에도, 필은 뻔뻔하게 대답한다. "정말 나랑 가깝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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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은 매일 반복되는 하루 속에 리타를 만나, 마치 시뮬레이션을 하듯 그녀를 알아간다. 마치 수학 문제를 풀 듯 어제 실패한 질문에 오늘은 다른 대답을 준비하고, 리타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2월 2일’에 그녀와 수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리타를 위한 ‘완벽한 하루’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날, 그는 성공을 확신하고 성급하게 스킨십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매서운 따귀 세례였다.

 

 

날 사랑한다고요? 날 알지도 못하면서.

- 잘 알아.

맙소사, 내가 속았군! 하루 종일 모든 걸 계획했죠?

내 친구들에게 나에 대해 캐물었어요? 이게 그쪽한텐 사랑이에요?

- 이건 진짜 사랑이야.

미쳤군요. 난 당신처럼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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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리타의 반응에 충격을 받은 필은, 절망을 느끼고 시계를 부숴버린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느낀 그는 절벽에서 차를 타고 떨어지고, 욕조에서 토스트기로 감전을 시도하며, 심지어 시계탑에서 몸을 던져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실패로 들어가고, 어김없이 그는 아침 6시에 자신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한다. 난 신이야!

 

 

신이라고요?

- 절대신은 아니고 그냥 신.

차 사고에서 살아나서요?

- 그게 다가 아니야. 몸이 폭발되기도 했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고, 독약도 먹고, 얼어 죽고, 목매 죽고, 타죽기도 했어. 그런데 매일 아침 상처 하나 없이 태어나. 난 불사신이야.

왜 이런 말을 하죠?

- 날 믿기 바리니까.

 

 

수많은 죽음의 경험을 통해 거의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한 필은, 리타에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 자신은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아느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 필은 지금까지 그녀와 보낸 시간 속에서 느낀 감정들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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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는 좋아하지만, 바다는 아니고. 여름에는 가족과 호수에 가는데, 거기엔 나무로 된 긴 부두와 지붕이 떨어져 나간 보트 창고가 있어. 혼자 있고 싶을 때 가던 곳도 있지. 프랑스 시와 라인석을 좋아하고. 당신은 관대하고 낯선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눈을 맞으면 천사처럼 보여.

- 어떻게 알죠?

말했잖아. 난 매일 여기서 깨어나. 매일 2월 2일인데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진솔한 그의 말에 흥미를 느낀 리타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야겠다며 그를 따라나서고, 필은 처음으로 아무런 의도나 계획 없이 리타와 마주한다. 이 시점부터 필은 그녀의 마음과 몸을 얻겠다는 생각 대신 ‘한 인간으로서’ 리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에 집중하고,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당신처럼 상냥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평생 처음 만나.

당신은 내게 과분해. 

하지만 가능하다면, 당신을 남은 평생 사랑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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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부터 필은 차도에 뛰어들거나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일을 모두 그만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나씩 찾기 시작한다.

 

길에서 만나는 노숙자를 따뜻하게 돌보고, 그동안 매정하게 대했던 동료에게 커피와 빵을 건네며, 생애 첫 피아노 교습을 받는다. 또한 식사 중에 질식할 뻔한 남자를 살리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구해주며, 길에서 쓰러진 노인을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한다. 그렇게 변하기 시작한 그는, 리포팅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체호프는 긴 겨울을 두고 암울하고 희망이 없는 계절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겨울은 삶의 순환의 일부일 뿐입니다.

펑서토니 주민들과 함께 서서 그들의 훈훈한 인정에 둘러싸여 있으니, 길고 멋진 겨울보다 더 좋은 게 없답니다. 

펑서토니에서 필 코너스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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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취재가 끝난 뒤 이어진 파티에서, 필은 그동안 갈고닦은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다. 그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받은 도움을 떠올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리타는 경매 이벤트에서 필을 ‘339달러 88센트’에 낙찰해 그와 시간을 보낸다.

 

리타와 저녁을 함께하게 된 필은 ‘비싸게 날 샀으니 제값을 해야 한다’며 얼음을 깎아 그녀를 닮은 조각을 만들고, ‘내일이나 남은 평생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사랑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리타가 말했던 ‘완벽한 이상형’의 남자가 되어 있었고, 진심으로 삶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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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벽히 행복했던 하루가 끝나고, 또다시 6시를 알리는 필의 알람 시계가 울린다. 필은 작게 탄식하며 눈을 뜨는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매번 홀로 깨어났던 그의 침대에는 리타가 있었고, 필은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2월 3일의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오늘은 내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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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필의 이야기는 분명 판타지스럽지만, 사실 우리의 하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발 아침이 오지 않길 바라며 잠드는 수많은 밤과, 어김없이 떠오른 태양에 절망하며 깨어나는 아침. 시시한 곳에 처박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단한 하루들. 그런 날들은 우리를 너무나 춥고 암울하게 만들어서, 마치 끝나지 않는 겨울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긴 겨울도 사계절의 일부일 뿐이고, 반드시 끝이 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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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이 주는 기쁨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같은 고통에도 훨씬 괴로워하기 쉽다. 필 역시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지만, ‘이 삶이 무한히 반복되더라도 당신을 평생 사랑하겠다’는 정신적 도약을 거친 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삶이, 이 고통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나는 ‘나만의 작은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결심. 이 순간을 ‘영원히 되돌아와도 좋을 순간’으로 만들겠다는 다짐.

 

이 단단한 긍정 덕분에, 2월 3일의 달력이 4일로 넘어간 순간 필은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내일이 되고, 내일이 다시 어제가 되는 이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이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대들이 일찍이 어느 한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적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일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이 된다.


그대 영원한 존재들이여, 이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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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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