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헤드윅과 지킬 앤 하이드가 여자라면 [공연예술]

공연예술 속 여성 캐릭터
글 입력 2018.08.18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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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세계’는 내가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격투장 주인인 에바가 화려한 댄서들과 함께 폭발적인 가창력을 뽐내는 이 장면은 잠시 괴물과 창조주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잊을 수 있을 만큼 현란하고 매력적이어서 많은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받는 장면이기도 하다. 특히나 이번 시즌에 프랑켄슈타인에 새로 합류한 박혜나 배우의 ‘남자의 세계’는 프레스콜 때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고, 기대를 잔뜩 안고 간 내게도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넓은 공연장을 압도하는 성량과 여유로운 눈빛, 파워풀한 목소리까지,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에바가 2막 초중반에 잠깐 등장하는 캐릭터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울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박혜나 배우가 남성 캐릭터인 빅터 프랑켄슈타인 역할을 맡는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의 안위만을 걱정하거나 이야기 전개를 위해 잠깐 등장하는 인물로 소비되는 작품 프랑켄슈타인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박혜나 배우를 비롯한 여성 뮤지컬 배우들의 무대 장악력은 사랑밖에 모르거나 누군가에 의해 희생당하는 의존적인 여성 캐릭터의 틀에 갇혀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도 사실이다. 자신만의 서사를 가진 주체적 인물들, 지킬 앤 하이드, 빅터 프랑켄슈타인, 앙리 뒤프레, 유다 벤허, 콰지모도가 여자라면 어떨까. 남성 캐릭터 중심의 공연 시장에서 관객들이 오래전부터 소망해 오던 리버스(성 반전) 공연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공연예술 속 여성 캐릭터




뮤지컬 팬들이 리버스 공연에 대한 갈증이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동안 공연계에서 여성 캐릭터를 소비해왔던 방식이 너무나 획일적이고 억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줄리아는 전통적인 여성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인 여성 캐릭터 중 하나이다. 줄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해바라기처럼 빅터만을 바라보며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다가, 빅터에게 복수하려는 괴물에게 희생당한다. 주인공에게 안타까울 정도로 헌신적인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의 ‘혼잣말’은 그녀의 유일한 솔로 넘버이다. 같은 배우가 1인 2역을 통해 연기하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까뜨린느도 줄리아에 비해 제법 강렬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듯하지만,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잠깐 등장하는 인물일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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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앤 하이드, 루시와 엠마>
 

이외에도 지킬을 위해 헌신하며 성녀와 창녀의 구도를 지키는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와 루시, 주인공임에도 수동성을 잃지 못하는 마타하리, 끔찍한 윤간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 외 연극 뮤지컬 작품 속의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은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묘사된다. 작품 안에서 수많은 생각을 하고 성장하며 변화하는 수많은 남자 주인공들과는 달리, 여성 캐릭터들은 그들만의 서사를 잃고 성녀 혹은 악녀로 이분화된다. 시대가 바뀌어가고 있는 지금도, 몇몇 연극 뮤지컬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의 최고의 기쁨은 ‘사랑’이며 최악의 시련은 ‘윤간’ 인 것처럼 보인다.

 

리버스 공연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은 여성 캐릭터와는 달리 공연계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고 살아 숨 쉬는 남성 캐릭터들은 아주 많다. 여성 관객이 90%에 육박하는 공연계에서 남자 배우들의 티켓 파워를 감안했을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입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요구는 연극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묘사와 성녀와 악녀 구도는 이제 너무 낡고 진부한 요소가 되었으며, 관객들은 보다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인물들을 그려내는, 완성도 높은 공연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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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공연은 지금껏 여성 캐릭터를 헌신, 사랑, 의존, 희생의 틀에 가두어 왔던 공연계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여성 소비자가 대부분인 시장에 여성들을 선두에 둔 극은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은 깨진 지 오래다.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의 기근 속에서도 위키드의 ‘엘파바’와 ‘글린다’, 사의 찬미 ‘윤심덕’, 키다리 아저씨의 ‘제루샤’는 여성 팬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오히려 다양한 여성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깊어지고 있는 연극 뮤지컬 시장에서, 매력적이고 능동적인 남성 주인공의 리버스(성반전)는 이미 충분한 시장성을 확보한 것이 아닐까. 아직 국내에서 리버스 공연이 진행된 사례는 없다.

하지만 뮤지컬 페스티벌에서 안유진 배우가 부른 프랑켄슈타인의 ‘위대한 생명창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와,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차지연 배우가 부른 헤드윅의 ‘Midnight Radio’는 관객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리버스 공연이 넘지 못하고 있는 한계는 공연 자체의 시장성이나 장래성이 아니라, 공연계의 고정관념과 관습일 뿐일지도 모른다.

*

요즘은 공연을 볼 때마다 엠마와 루시가 연기하는 지킬 앤 하이드와 이츠학이 연기하는 헤드윅, 줄리아와 엘렌이 연기하는 빅터와 앙리를 상상한다. 연극 뮤지컬 작품 속에는 실력 있는 여배우들이 연기해주었으면 하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참 많다. 여배우들이 고정된 성 역할과 의존, 헌신, 희생으로 귀결되는 여성 캐릭터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미지 출처
지킬 앤 하이드 월드투어 공식 프로필
한국뮤지컬어워즈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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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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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나무늘보
    • 글 잘 봤습니다. 저 뮤지컬들을 보지 않아 조심스럽게 댓글 달아봅니다.말씀하신 대로 '여자였으면 어땠을까'라는 관점으로 작품 재해석을 하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취지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소 각색을 하더라도 원전이라는 큰 줄기를 따라가고자 남자 역에 남자 배우를, 여자 역에 여자 배우를 차용한 것이 구태의연한 관습인지 의문입니다.

      이미 잘 아시다시피 뮤지컬들의 원작인 프랑켄슈타인(1818)과 지킬박사와 하이드(1868)는 약 200년 전 작품들입니다.  200년 전 여성관에 의거해 만들어진 캐릭터들을 지금의 기준으로 비판하면 너무 지나친 처사 아닐까요. 물론 21세기에 만들어진 창작물로 뮤지컬을 만들었는데 고정된 성역할만을 보여준다면, 현대인들의 인식이 크게 바뀐 만큼 시대적 담론에 부합하지 못하는 작품을 비판할 수 있겠죠.
       
      90년대에 만들어진 헤드윅의 이츠학 역시 스토리 상 남성 캐릭터를 남배우가 맡은 것 뿐 아닌가요. 게다가 헤드윅은 기존에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성 소수자를 주제로 만든 뮤지컬이며 주인공부터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를 존재가 되어 서사를 이끌어가는 작품으로 고정된 젠더 인식의 틀을 깬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굳이 남자가 하니 여자가 하니 하는 건 되려 우스운 일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자꾸 리버스를 강조하는 것보단 여성이 고정된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 21세기의 작품들을 뮤지컬로 제작해달라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더 강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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