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매력 없는 '현대미술관' [문화 공간]

현대미술과 미술관, 그리고 미술관이 갖는 과제
글 입력 2017.11.2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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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관은 요즘 우리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주변에도 주말에 전시회나 미술관에 다녀왔다는 사람은 열에 한명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나마 애인이 있는 사람들? (미술관과 전시회는 좋은 데이트 코스이니까) 예전부터 사람들의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그칠줄을 몰랐다. 요즘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예술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미술관은 그렇게 멀리 하는가. 대체 무엇이 미술관으로의 우리의 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는가. 이에 대한 고찰을 담았다.

이번 기록에서는, 현대미술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보편적인 생각을 정리한 후, 이를 바탕으로 미술관이 마주한 현실과 당면과제에 대해 논의한다.


현대미술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말하기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대중들에게, 현대미술은 멀고도 가깝다는 것.



1. 현대 미술은 우리와 멀다.

이것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미술이 갖는 예전 미술과의 차이점을 말해보아야 할 것 같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현대미술은 이전과는 달리 '의미'에 중심을 둔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전 미술작품의 대표로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꼽겠다. 그에 대응하는 현대미술작품은, 바로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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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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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


<천지창조>는 그 그림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천지가 창조되는 그 당시의 모습을 구현한 것, 또 그 구현된 모습, 혹은 그 아우라. 그것이 우리가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전부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은 어떠한가. 파이프와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 그 작품의 감상이 끝나느냐, 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이미지의 반역>은, ‘의미’와 ‘의도’가 형상화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의미 유추'와 '철학적 사유'로 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렇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술가들의 창작 태도도 변화하였다. 이전의 미술가들은 그저 상상이나 현실의 형태를 그려내는 것에 머물렀다면, 현대의 미술가들은 의미 전달을 위해 작품을 창작한다. 둘 중 무엇이 더 우위에 있느냐는 고를 수 없지만, 미술가들의 창작태도가 변화한만큼 우리들의 감상태도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잘 알 것 같다.

이것이 현대미술이 우리와 '멀리 있는 이유'이다. 그냥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작품을 보고 그 위대함과 형태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만 해도 되었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현대 미술을 감상하기 위해 우리는 생각을 하고 뇌를 돌리고 능동적으로 그 의미를 유추해야 하는 것이다. 



2. 현대미술은 우리와 가깝다.

현대미술이 ‘의미’와 ‘의도’를 중심으로 하며 발전하는 만큼, 그 작품의 형태도 많이 변화하였다. 이전에는 캔버스에만 액자에만 머무르던 아르스와 테크네가 이제는, 인간의 몸에 돼지의 지방에 담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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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보이스의 기름덩어리 의자


요셉 보이스를 보라. 그는 주로 행위예술과 지방, 토끼의 시체를 이용하여 작품을 창작했다. 그 나름의 뜻을 가지고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전시되었다. 왜 일시적으로만 전시되었나,라는 의문이 든다면 그 작품의 재료들에 주목해주시길. 어딘가에 오래 담아두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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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몸으로 쓰다'에 전시된 오노 요코 '컷피스' 촬영본


따라서 현대미술은 촬영되었다. 기껏해야 몇 일 정도만 전해지는 작품들을, 오랫동안 보고 느끼기 위함이었다. ‘아우라’는 몰락했지만. 어떠한가, 그래도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랫동안 즐길 수 있게 된 것을.

사람들은 따라서 현대미술을 노트북으로도, 컴퓨터 화면으로도, 책으로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특정 현대미술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도 한정적이므로 배제한다면, 모니터나 종이 위에서나 모든 작품의 감상은 모두에게 동일한 거리에서의 경험이라고도 이해 가능하다. 집에서 행위 예술의 영상을 보나, 미술관에 전시된 행위예술 영상을 보나 그 느낌은 똑같다는 것이다.

‘모든 곳은 미술관이 될 수 있으며, 어디서든 작품을 접할 수 있다.’



3. 현대미술을 담는 그릇, '현대미술관'의 과제와 노력
 
미술관에게 '현대미술'은 전통적 미술작품보다 까다로운 친구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먼저,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나 <천지창조> 등과는 달리, 지금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절대적 관심을 받지 못한다. '엥? 저런 것도 예술이야?'라는 의문이 들만한 작품들을 사람들은 보러가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현대미술의 범위 확장에 따라, 현대 미술관의 개념이 확장되었다. 우리는 요셉 보이스의 작품을 보기 위해 굳이 미술관을 찾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것은 현존하지 않기때문에 그것을 감상할 방법은 영상을 보는 것 밖에 없으며, 이 영상이라는 것은 집 혹은 미술관, 어디에서 보아도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볼 수 있는데 굳이?’ 수용자들이 집이라는 미술관을 놔두고,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실제 미술관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미술관의 개념이 확대됨에 따라, 현대미술관이라는 개별공간은 그 존재 이유는 희미해졌다.

지금 시대는 사람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굳이 돈을 들여 루브르 박물관을 찾던 그 때와 다르다. 미술관은 이제, 사람들이 굳이 실제 미술관으로 걸음할 '이유'를 만들어야만 한다.

이러한 위기를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한 현대미술관이 있다. 바로,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아래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 <피스마이너스원 : 무대를 넘어서>라는 현대미술과 지드래곤의 만남을 담은 사진이다. 매력적인 셀러브리티와의 콜라보를 통해 관심을 이끌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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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마이너스원 : 무대를 넘어서>


이런식으로, 앞으로도 현대미술관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할 것으로 보여진다. 대중들에게 미술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교양을 길러주는 것이 그들의 존재이유이자 가치니까.

또한, 대중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기꺼이 현대 미술을 보러갈 의향이 있다. 현대미술관은 우리를 위해 직접 걸음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소개할테니 말이다. 또한, 그들의 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써. 벌써부터, 그들이 어떤 매혹적 작품과 전시로 우리를 유혹할지 기대가 된다.





사진 출처

나무위키
SIAPLAN
중앙일보
외 직접 찍은 사진을 첨부하였습니다.


[손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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