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마시멜로의 아이들에게

나는 이제 내일을 기다려
글 입력 2023.12.1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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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다이어리



연말이 되면, 대청소를 시작한다. 한 해의 물건들을 버리고 정리하면서, 그해의 미련과 궤적을 살펴본다. 때로는 물건을 치우다가 상념에 잠겨 추억여행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왜 이걸 이때껏 갖고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깔끔하게 미련을 접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내게는 아직도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쓰던 공책과 문제집으로 빼곡히 채워진 책장이 있다. 어느 날인가, 더는 그것들이 없어도 되겠구나 싶었다. 그 노력의 흔적이 없어도, 그것들로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됐다. 열등감과 내 안에 아직도 자리하고 있던 선망은 그제야 떨어져 나가려고 했다.


20세를 맞던 해의 다이어리는 그렇게 발견되었다.

 

 

 

마시멜로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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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마시멜로 한 개가 놓인 접시가 있다. 이 마시멜로를 먹어도 되지만, 선생님이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까지 먹지 않으면 마시멜로 두 개를 먹을 수 있다. 참거나, 먹거나. 아이에게 선택지 두 개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 실험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성공이 결정된다.


1960년, 미국에서 진행된 마시멜로 실험은 오류가 있음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믿고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처럼 한국 사회는 이런 성장 신화에 기대어 해를 버텨왔다. 성장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믿음. 고통이 없으면 성장도 없다는 믿음. 어쩌면 우리는 현재의 고통을 견디고 견디며 약속되었다 믿는 미래를 기다리는 마시멜로 실험의 아이들이 아닐까.


나는 오래도록 마시멜로 이야기를 곱씹으며 자랐다. 언젠가 마시멜로가 하나 더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입 안 살을 깨물고 혀를 물며 버티고 기다려왔다. 허기와 유혹을 참고 참은 끝에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올 거라는 믿음. 그것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도대체 언제쯤 마시멜로는 내 입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걸까. 그것이 정말 오기는 할까.


 

나는 이상하게 어린 시절부터 의식 속에서 성장은 곧 쇠락이요, 이 영속적인 상실의 과정은 여러 개의 잔혹한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아멜리 노통브, 『배고픔의 자서전』, 열린책들, 2014)

 

 

아멜리 노통브에게 성장은 쾌락에 탐닉하고 몰두하는 힘을 상실하게 했다. 이는 성장과 진보를 늘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는 전혀 다르다. 아멜리에게 성장은 곧 상실이었다. 그것은 20세를 맞던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만끽할 수 있는 자유의 달큼함보다 책임의 씁쓸함이 내게는 더 자극적으로 와닿았다. 나에게 성장은 곧 더는 내가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예쁨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내 몸은 웃자라는 식물처럼 커졌고, 나라는 존재는 그와 반대로 줄어들기만 했으므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노력은 보답받지 못했다. 고통을 참아왔지만 성공은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입시는 실패했고, 이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 많았고 동시에 너무 없었다. 그것들은 언제든 갖다 붙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정신과 육체의 간극에서 나는 늘 허기를 느꼈고 수치심을 느꼈다. 삶은 내게 수치를 견디는 일이 된 지 오래였다. 


소위 ‘민증 잉크도 마르기 전’ 편의점과 술집으로 달려가 술을 사던 친구들의 소식을 뒤로 하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없이 울며 스무 살을 맞았다. 새로 산 다이어리에는 “숨 쉰 횟수만큼 행복해지자”고 쓰고서는. 제일 좋아하지 않는 색으로 오늘의 기분을 칠해두고서는.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내가 받을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어디에 떳떳해지고, 어디에 바람직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걸까. 나는 누구를 저주하면서, 동시에 누구를 닮아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성찰하면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1월 9일)

 

“나는 잘 모르겠다. 뭘 해야 하는지 묻는 말에 답해줄 사람이 없다. ‘몰라’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청자를 짜증 나게 하는 답이다. 그런데 나는 정녕 모르겠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가 내가 생각보다 더 실제로 못났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1월 17일)

 

“존재 자체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1월 28일)

 

“무언가를 믿기에는 세상이 너무 이상한데, 남을 의심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그러니 계속 저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윤이형, 「엘로」,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

 


입시 실패로 인한 실망과 좌절, 진득한 우울함이 글씨에는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며칠은 글을 쓰고, 며칠은 쓰지 않아서 기록은 일정하지 않았다.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몇 년 간의 기억이 실제로 없다. 지금에서야 겨우 그때 힘들었구나, 숨 쉬며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구나 짐작한다.


그때는 내일이 오는 것이 참 두려웠다. 내일의 나를 또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어린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붉게 물든 노을을 살피며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는 직감에 늘 휩싸였던 나였기에. 시간의 흐름은 더 암담하게 느껴졌다.

 

 

 

내일의 나를 기다려



성인이 된 지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와서 다시 살펴보면 생각보다 나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운이 좋았던 건지 엄청 슬프고 무서운 일은 생각만큼 잘 없었다. 나쁜 일은 차고 넘치지만 상상만큼 끔찍하진 않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은 무책임하지만 다 지나고 보면 정말 괜찮아졌다. 다만 내가 그 고통의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시간을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괜찮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그 모든 시간이, 좌절과 방황, 슬픔, 작지만 빛나는 성공이 비로소 켜켜이 쌓여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나를 다독일 수 없어 대신 다이어리를 쓰다듬는다. 힘주어 꾹꾹 눌러쓴 마음에 뺨을 대고 가만히 숨을 몰아쉰다. 나를 안아주듯 가슴을 다독인다. 

 

그래도 잘 버텨왔다고. 나는 이제 내일을 기다리며 산다고. 과거의 나에게 전할 수는 없지만, 미래의 또 힘든 나에게는 전할 수 있겠지 생각하며 글을 남겨본다. 


괜찮다고, 마시멜로를 기다리느라 너를 괴롭히거나, 마시멜로를 먹었다고 좌절할 필요 없다고. 모든 건 나를 위한 최선이었을 테니까. 


나는 이제 내일의 나를 기다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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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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