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락함과 무료함 그 경계에 선 우리, ‘스프레이’ [공연]

글 입력 2017.01.0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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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레이포스터(1).jpg



시놉시스

  옆집 고양이 울음소리에 밤새 잠을 설친 709호 남자는 실수로 109호 택배를 집어온다. 남의 택배를 뜯는 순간 짜릿한 쾌감을 느낀 남자는 이후 의도적으로 남의 택배를 집어오기 시작한다. 옆집고양이 울음소리와 새벽에 귀가하는 옆집여자의 소음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은 계속된다. 하지만 남자의 항의는 인터폰 너머 옆집여자의 무례한 반응으로 번번이 묵살된다. 지속적으로 택배를 훔치던 어느 날 드디어 남자는 옆집 택배를 발견한다. 복수심이 발동한 남자는 옆집여자의 택배를 훔쳐온다.

  하지만 택배상자에 담긴 건 옆집 고양이의 시체........



  내가 연극 ‘스프레이’의 공연 소개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웬만치 삶의 모습을 노련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연극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닌, 많은 생각과 관찰을 통해서만 이 시놉시스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침묵 속에 박힌 시한폭탄’이라는 예상치 못한 소개를 접했을 때에는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기대감보다 이질적인 단어들의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것이 더 앞섰다. 이렇듯 나는 이 작품을 다소 멀리 생각하고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으로 길을 나섰다.

 
  스프레이를 보면서 관객이 집중하게 되고 또 몰입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를 뽑자면 바로 무대 구조와 연출이라고 이야기하겠다. 이 연극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존재가 있다. 바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코트 깃을 끝까지 빳빳히 세워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마치 배경인 듯 유령인 듯 움직이는 묵자들이다. 이들은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가벽으로 주인공이자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인 709호 남자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서 눈에 보이는 현실의 공간, 혹은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 속 공간을 창조해낸다. 공간을 창조해냄과 동시에 그들은, 그 공간을 좁혀나가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고 확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결코 그들의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들은 남자의 상황, 심리에 맞춘 공간의 창조, 확대, 축소를 눈에 보이도록 표출하는 역할을 대신 도와주는 것 뿐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들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설정은 훌륭하다. 그들은 또 다른 가벽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무대 속에는 또 다른 무대가 있었으나 709호 남자의 입장에서 그 공간은 결코 무대가 아닌, 내면이자 현실이었다.

  이렇게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데에는 가벽과 묵자의 역할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에서는 빛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한 쪽에서 들어오는 빛은 더욱 극적인 효과를 주고, 강하게 무대 전체를 비추는 빛은 매우 일부분이었다. 709호 남자의 긴장과 불안, 떨림이 가득한 장면에서 조명은 오직 그만을 강하게 비춘다. 그 순간, 그는 마치 그 조명이 비추는 좁은 공간 속에서 혼자 뚝 떨어져 있는 섬처럼 외롭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 많고도 복잡한 느낌, 그 찰나의 적막함과 혼자된 느낌을 조명 하나로 연출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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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오브제 연극’이다. 오브제 연극? 생소한 장르이다. 오브제란 사물을 뜻한다. 연극에서 사용되는 빛과 소리, 소품 모두가 오브제에 포함된다. 때문에 오브제 연극은 이러한 오브제들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일반 연극에서 대사, 즉 말로서 표현되는 상황을 빛과 소리와 소품 등의 오브제로 대체한다. 그래서 스프레이의 배우들은 말이 적고 표정과 몸짓, 음향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이들은 보이지 않고 언어로 전달되지도 않는 곳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 요소들이다. 709호 남자는 직장에서 자신의 일을 성실히 꼼꼼히 해내고, 고객을 대할 때 절대 미소를 잃지 않는 우수한 서비스맨이다. 그는 고객에게 수많은 구두를 신겨주고 벗겨주고, 또 신겨준다. 고객이 떠난 후에도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발들이 떠돌았다. 그는 여기저기서 던져지는 신발을 그 발들에 신기고 또 신겨준다. 그에게 그 일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것을 관객은 말 한마디 없는 액션만으로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가 708호의 택배상자를 뜯기 직전, 오로지 하나의 조명 속에 담긴 그의 점점 커지고 빨라진 심장 고동은 그가 택배상자를 뜯어버리자 갑자기 뚝 멈춰버린다. 그가 가져온 많은 택배상자들 중에서 가장 떨리고 긴장되며 또 어쩌면 가장 기대했을지도 모르는 그 상자를 뜯어버리는 일이 순간, 아주 짧은 그 순간, 귀를 울리던 심장 고동소리가 멈춘 그 순간, 그에게 ‘사실 그렇게 두려운 일은 아니었네, 별거 아니었어’하는 생각을 주지는 않았을까.

 
  실수 없고 빈틈 없는 촘촘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에게 옆집 708호 여자의 고양이는 가장 큰 스트레스이다. 708호의 여자와 고양이는 끊임없이 소음을 만들어낸다. 그가 처음으로 타인의 택배상자를 가져왔을 때, 그리고 그것을 뜯어버렸을 때, 그는 그것이 절대 고의가 아닌, 고양이가 시끄럽게 울어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탓에 저질러버린 ‘실수’라고 치부해버린다. 고양이는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이 실수를 가장한 일탈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자기 합리화의 토대가 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실수를 저지를 때면 ‘축축한 놈’ 하고 말하곤 했다. 그가 다한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 중 그는 손을 여러번 바지에 문지르며 땀을 닦는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에 관객은 쉽게 그가 다한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옛날 첫사랑 그녀에게 실연당한 이유를 다한증에서 찾았다. 다한증은 실연의 상처를 탓할 수 있는 또 다른 자기 합리화가 되었다. 그는 ‘축축한 놈’이라는 그 말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경찰이 찾아와 ‘땀냄새 제거 스프레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잔뜩 긴장해 ‘제가 좀 축축해서요’하고 그 말을 시인한다. 이 말은 그의 은밀한 잘못들을 모두 보아온 관객에게 또 다른 변명으로 들린다.

  그의 삶은 이렇듯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생각과 변명들로 가득 차왔다. 이는 삐뚤어진 시선이 되었고 그가 저지르는 알 수 없는 행동들의 원인이 되었으며 자신을 비롯하여 누군가의 삶마저 파멸로 이끈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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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이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불만을 가지고 있던 709호의 그 남자는 자신의 복수 때문에 708호 여자가 더욱 죽음으로 내몰렸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너무 조용한 옆집을 불안해한다. 그는 경비실에 전화하여 ‘옆집이 너무 조용합니다’하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경비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하고 되묻는다. 우리는 조용하다는 것이 안정을 뜻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무(無)를 뜻하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다. 조용한 삶이란 안락함인가, 무료함인가. ‘스프레이’는 그 경계에서 서성이는 우리에게 당신의 조용한 삶이란 어느 쪽에 해당되는 것이냐며 이런 질문을 던져온다.

 
  스프레이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의문의 인물 묵자와 마치 환자와 같은 거친 숨소리, 고양이의 울음소리, 파란 조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으스스한 분위기로 시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는, 평온해보이지만 그 속의 실상은 차갑고 잔혹한,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스프레이 속에 담긴 수 많은 이야기와 그를 통한 많은 생각들은 80분 안에 다 담을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해본적 없던 것이었다. 무조건 어렵고 이질적일 것이라 생각한 이상한 광기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은 어딘가 익숙한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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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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